하루도 빠짐없이 나오던 그가 나흘째 보이지 않는다.
첫째 날은 ‘시간이 안 맞았나?’ 생각했다.
둘째 날 안보였을 때는 ‘아예 다른 시간으로 옮겼나?’ 생각했다.
셋째 날 보이지 않았을 때는 ‘얘가 어디 아픈가?’했다.
오늘까지 안보이자 심지어 ‘나랑 자주 마주치니까 싫어서 피하나?’라는 자책까지 하게 됐다.
산책남은 나의 걷기 운동 의지를 불러일으킨 장본인이다.
백 번 ‘건강을 위해서, 삶의 변화를 위해서’ 외치며 자신을 다독이는 것보다
'산책남 얼굴 한번 보기'가 훨씬 나았다.
그런데 그가 사라졌다.
이것은 큰일이다.
후회했다.
앞으로 영영 못 보는 것 아닌가 걱정도 했다.
이럴 줄 알았다면 말이라도 한번 걸어보는 건데, 차이더라도 한번 시도라도 해보는 건데. 가슴을 치며 한탄했다. 미련을 남기는 어리석은 짓을 또 하고 말았다.
이성적으로 생각해보기로 했다.
설득력 있다. 지금 너도나도 한국행이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치료도 못 받고 죽을 바에는 한국에 짐 싸들고 가는 분위기다.
갑자기 서러움이 밀려왔다.
서러움에 이어 배신감까지 느꼈다.
상상력이 과해지고 있다.
그런 내가 이젠 한심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정도로 산책남은 중요하고 결정적인 존재였다.
그리고 고마운 존재였다.
또다시 기회를 잃었다는 생각에 기운이 빠졌다.
팔을 휘저으며 걷던 용맹도 지금은 사라졌다.
안 한 듯 꼼꼼하게 신경 써서 했던 화장도 의미가 없어졌다.
그에게 아름답게 보이기 위해 했던 그 수많은 행동들이 무의미해진 것이다.
자책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리기 시작했다.
매력적이고 관심이 있었다면 계속 마주친 내게 말 한마디라도 걸지 않았을까.
나를 의미 없는 존재로 생각했기 때문에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고 그렇게 홀연히 사라진 것이 아니었을까.
이 상사병이 오래 지속되지 않기를 바란다.
미국에서 아프면 답도 없다..
(이 글은 코비드 19로 외출 금지령이 내려진 미국 조지아 주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2020년 3월과 6월 사이 100일 동안 걷기 말고는 할 것이 없었던 한 여성의 '처절한'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