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9시가 조금 안 되는 시간. 약속 장소는 6층이었다. 엘리베이터를 탈까 고민하다가 조금 일찍 도착하기도 했고 운동 삼아 계단을 이용하기로 했다. 한 층씩 올라가는데 창문 사이로 따사로운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온몸으로 빛을 맞으며 계단을 오르니 힘이 들기는커녕 오히려 기분이 좋았다. 올빼미족인 내가, 이렇게 아침 햇살을 맞는 건 보기 드문 일이었다. 일찍 나오길 잘했단 생각이 들었다. 어느새 목적지인 6층에 이르렀다. 계단을 다 오르고 나니 마음은 가벼워졌지만, 아침 햇살과 작별해야 한다는 생각에 이상하게 조금 아쉬웠다. 한순간에 양가적 감정이 올라왔다. 그래서 그랬던 걸까? 나도 모르게 왼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눈앞에 재미난 모습이 나타났다. 6층 바닥엔 다른 층에서 볼 수 없었던 수묵화가 그려져 있었다. 누군가 복도에 내어놓은 나무를 대상으로 빛이 그려낸 그림이었다. 역광이어서 자그마한 나무의 모습이 또렷하게 보이지 않았지만 바닥에서 만큼은 선명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액자 역할을 자처한 창틀 덕분에 유난히도 한 폭의 그림처럼 보이는 순간이었다.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지금'을 기록하고 싶어 가방에서 카메라를 꺼내 급하게 셔터를 눌렀다. 그런 후 몸을 반대로 돌려 약속 장소로 걸어갔다. 빛을 등 뒤에 두자 바닥엔 길쭉한 사람이 그려지고 있었다.
자리를 마치고 나와 홀로 근처 카페에 들러 오전에 찍었던 '수묵화' 사진을 꺼내봤다. 그런데 이게 웬걸. 그때는 몰랐는데 저장된 사진이 흑백이었다. 아마도 카메라를 급하게 꺼내면서 미리 설정해 뒀던 흑백 모드로 다이얼이 돌아간 것 같았다.(jpeg으로 촬영했기 때문에 흑백 모드로 촬영하면 컬러 정보가 전혀 남지 않는다) 사진을 가만히 들여다보는데 아쉽기는커녕 웃음만 새어 나왔다. 이유는 따로 있었다. 사진을 찍을 당시, 그 장면을 담으면서 나중에 현상하게 되면 흑백으로 바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젠 어쩔 도리 없이 흑백으로만 남게 되었으니 마치 카메라가 내 마음을 알아챈 것 같아 웃음이 나왔던 거였다.
평소와 달리 아침 일찍 약속을 잡았고 6층까지 계단을 이용했으며 복도엔 마침 누군가의 나무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절묘한 타이밍에 일어난 실수가(혹은 내 마음을 알아챈 영리한 카메라 덕분에) 더해져 재미난 추억이 만들어졌다. 일상의 우연이 행복 한 '조각'을 남겨준 시간. 시간이 지나면 해가 달아나고 달아난 해가 그림자를 사라지게 하듯 언젠가 기억에서 사라질 자그마한 일이겠지만 단 한 순간이라도 나를 행복하게 해 줬으니 그것으로 충분히 빛났던 하루였다.
10월엔 유난히도 비가 자주 내렸다. 가뭄으로 걱정하던 일이 얼마 전인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많이 내렸다. 사람들은 이제 장마가 10월로 옮겨 간 것이 아니냐며 진한 아쉬움 섞인 농담을 하기도 했다. 내게도 마찬가지였다. 느닷없는 10월의 장마(?)로 인해 노을을 자주 보지 못한 것이 가장 아쉬웠다. 물론 비가 내렸던 시간만큼 우중런으로 채우며 마음을 달래기도 했지만 사랑하는 노을과 오랜 시간 떨어져 있는 건 꽤 힘든 일이었다. 비가 오지 않았던 날도 구름 잔뜩 낀 우중충한 하늘이 마음마저 그렇게 만드는 것만 같아 영 기분이 좋지 않았다.(날씨 때문에 우울해져서 영국에서 축구하는 게 힘들다던 선수들의 인터뷰가 떠올랐다) 그래서 그런지 10월은 마음이 어수선한 달이었다.
이번 주 어느 날 오전이었다. 안방에서 나와 거실의 커튼을 젖히고 창밖을 보는데 오랜만에 만난 화창한 날이었다. 하늘에 떠 있는 구름을 보니 느낌이 딱! 왔다. '오늘이다!' 오랜만에 제대로 노을을 볼 수 있는 날. 바로 그날이었다. 평소라면 오후에 하는 업무 일정을 얼마 남지 않은 오전으로 모두 옮겼다. 힘을 내어 점심시간까지 모든 일을 마친 후 헬스장에 가서 웨이트 트레이닝까지 마무리하고 기분 좋게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늦은 점심을 차려 먹고(계란말이와 참치 통조림과 김치만으로 충분했다) 주섬주섬 카메라를 챙겼다. 한강으로 나가 잔디 위에서 여유를 즐길 사람들과 해가 넘어가기 시작하면서 적당히 내릴 따사로운 햇살을 상상하며 렌즈를 골랐다. 이날 정한 화각은 28mm였다. 내가 사랑하는 초점거리는 28mm와 40mm인데 넓은 공간을 담고 싶어 28mm를 선택했다. 시계를 보니 어느새 4시 30분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요즘 해가 넘어가는 시간은 5시 40분 정도였다. 골든아워를 만나려면 최소 30~40분 전엔 목적지에 도착해 있어야 했고 본격적으로 해가 넘어가는 시간은 한 시간 전부터 시작되기 때문에 서둘러야 했다.
가방은 단출하게 꾸렸다. 서브용으로 작은 똑딱이 카메라 한 대와 한입에 들어가기 좋은 에너지 바 두 개, 러닝 할 때 사용하는 250ml 소프트 플라스크에 생수를 가득 채운 후 에어팟과 지갑만 넣어 한강으로 나섰다. 28mm 렌즈를 물린 메인 카메라는(작정하고 나갈 땐 레인지 파인더 카메라를 메인으로 사용 중이다) 반대쪽 어깨에 걸쳤다. 약간 설레는 마음으로 공원을 향해 걸었다. 5분 후 나타난 나들목을 지나 한강 공원으로 들어서자 상상하던 모습이 펼쳐졌다. 잔디밭엔 피크닉을 나온 사람들이 가득했다. 날씨를 생각하면 평소보다 훨씬 적었지만(아무래도 여기저기 열리는 축제에 간 듯했다) 오히려 적당히 거리를 둔 모습이 평온해 보여 보기 좋았다. 사람들은 잔디에 앉아 음식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며 간이 텐트를 치고 누워있었다. 그리고 그곳을 향해 해가 점점 노란빛으로 변하며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 순간을 그냥 흘려보낼 순 없었다. 오른쪽 어깨에 멘 카메라를 왼쪽 눈으로 가져가 셔터를 눌렀다. 파인더 안에 보인 그들의 뒷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내게 행복이 전해지고 있었다.
한 곳에 오래 머무르기엔 남은 시간이 별로 없었다. 좋아하는 촬영 장소로 이동하려면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다. 이동 중에 재밌는 장면을 만나면 셔터를 누르지 않고선 지나칠 수 없단 걸 알기 때문에 더 그랬다. 다만 그럴 땐 주의해야 할 게 있다. 두 다리는 바삐 움직이더라도 시선은 천천히 따라가야 한다. 마치 유채 이탈한 것처럼 몸은 목적지를 향해 저 멀리 가더라도 눈과 마음은 느긋하게 뒤에 남겨두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몸은 시간에 맞춰 갈 수 있고 시선은 마음을 따라갈 수 있다.
하늘이 오렌지빛으로 물드는 골든아워는 길면 20분 짧으면 10분 만에 끝나 버리고 만다. 그래서 찰나를 담기 위해선 언제나 미리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몸도 마음도. 두 다리가 열심히 움직인 덕분에 원하는 장소에 늦지 않게 도착했다.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은 후 해를 등지며 지나가는 사람들의 실루엣을 담았다. 인간이란 동물은 표정이 보이지 않아도 온몸으로 감정을 뿜어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림자만으로 피사체의 감정을 담아내 보고 싶었다. 이날 만난 노을이 마음에 꽉 차는 빛은 아니었지만 오랜만에 만나서 그런지 그 어느 때보다 반가웠다. 나의 의도가 비록 사진에 잘 담긴 것 같지 않아 아쉽지만 마음만은 순간에 남길 바라며 해가 떠나는 짧은 시간을 행복으로 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