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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람 여행자 May 07. 2019

6화_ 한 스위스 가정의 크리스마스

진짜 나무를 베어다 크리스마스트리를 만들다.

겨울 유럽여행은 정말 고달파요.

기온이야 뭐, 한국이 더 춥겠지만,

무엇보다 햇빛을 가리는 먹구름이 잔뜩 껴 우울합니다.


대신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아쉬움을 달랩니다.

유럽에서는 크리스마스가 가장 큰 축제인데요.

사람이 북적일만한 거리면 어김없이 크리스마스 마켓이 들어서죠.

따듯한 와인, 장식품, 전통 음식이  관광객과 현지인들의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주머니가 가벼운 저는 그저 분위기만 샀네요.

이웃 동네의 크리스마스 거리 장식

루이스네 집에도 크리스마스가 찾아왔습니다.

하루는 루이스가 크리스마스트리를 사 왔다며 를 불렀는데, 아니 세상에.

한국에서 보던 플라스틱 인공 나무가 아니라 진짜 나무를 베어왔습니다!

높이도 2m 나 되고, 양팔로는 도저히 감쌀 수 없는 어마어마한 크기.

시트콤에서나 나올 법한 일이 눈앞에 벌어졌습니다.


살아있는 나무에서 뿜어 나오는 솔향은 목조주택에 잘 녹아들었습니다. 집 안에서 은은한 산림욕을 하는 기분이랄까요. 상록수라지만 잘려나간 뿌리 없이 얼마나 푸르름을 유지할진 모르겠네요.

     

트리 장식을 하다 보니 무엇인가 하나 빠진 느낌이 들었습니다. 화룡점정이 없었어요. 크리스마스트리의 꽃, 미니 전구 장식 말이죠. 촌스러운 멜로디에 맞춰 깜빡이는 속도가 느렸다가 빨랐다가 하는 그 전구!


  “루이스! 여기 트리에 두를 전구 장식이 없는 것 같은데요?”


하지만 루이스가 가져온 건 새끼손가락만 한 양초 묶음이었습니다. 저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멍하니 세바스티안을 쳐다봤죠. 그는 이내 스프링으로 만든 촛대에 양초를 끼우더니 트리 위에 곧게 세웠습니다.

상상도 못 했어요. 전구가 아닌 진짜 양초를 달 줄은!

진짜 나무도 모자라, 이번엔 진짜 타오르는 촛불을 피울 셈이었습니다.


크리스마스 밤을 축하하기 위한 모든 준비는 끝났습니다. 이윽고 트리 위에 있는 양초에 하나둘 불을 붙인 뒤, 방 안에 있는 모든 전등을 껐죠.


우리 앞에는 활활 타오르고 있는 진짜 촛불이 모여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했습니다. 아지랑이처럼 조금씩 일렁이는 작은 불꽃. 촛농은 정맥주사처럼 방울져 상록수 위로 떨어졌어요. 양초는 더 태울 것이 없어지면 저절로 연기 조각이 되어 공기 중으로 사라졌습니다.


식탁에는 제가 좋아하는 통 올리브가 듬뿍 들어간 피자가 갓 오븐에서 나와 따끈따끈 숨을 쉬었고, 유리잔에는 신선한 블랙베리 주스가 가득 담겼어요. 술을 마시지 않는 호스트 가족이라 살짝 아쉽긴 했지만요.


와인이 없어도 얼마나 낭만적입니까.




“고-요한 밤…. 거-룩한 밤….”


피자를 먹다 말고 세바스티안이 제안했습니다. 이제 캐럴을 부를 차례라고.

뜬금없긴 했지만, 루이스네 가족은 크리스마스 때마다 함께 캐럴을 부른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이라는 캐럴을 각자의 모국어로 함께 불렀어요. 분명 서로 다른 언어로 노래했지만, 그게 무슨 뜻인지, 어떤 부분을 노래하는지 분명하게 알 수 있었죠.


캐럴을 누구와 함께 부른 적이 얼마나 됐을까요.

아니, 그것보다 지난 크리스마스를 가족과 함께 보낸 적이 있었나 떠올려봅니다.


그런데 캐럴 합창(?)이 끝나자마자 루이스가 크리스마스 선물을 주는 게 아니겠어요?

정성스레 싸인 포장을 뜯어보니 빅토리녹스(Victorinox) 맥가이버칼이 들어있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제가 글루바인(Glühwein: 따뜻한 와인)을 좋아하는 걸 알고, 한국에서 만들어 먹으라며 주재료인 시나몬 스틱까지 함께 챙겨주었어요. 시나몬 스틱은 한국에서 쉽게 구할 수 없는 재료-동네 마트에는 없었으니-라고 언젠가 흘려 말했었는데, 루이스가 기억해두었나 봅니다.


너무나도 고맙고 미안했어요. 저는 한 푼이라도 아끼고자 아무런 선물을 사지 않았거든요. 오직 줄 수 있는 건 한국에서 가져온 한지 위에 붓 펜으로 쓴 그들의 한글 이름과 뒷면에 적은 짧은 편지뿐이었습니다.

    

깜짝 선물을 받고 보니 초라하기 짝이 없는 제 선물. 이건 마치 불공정 거래라고 해야 할까요. 결국, 가장 자신 있는 노래, <델리스파이스의 고백>을 직접 불러주었습니다. 뜬금없는 노래 선물이었지만 고마운 마음은 잘 전달되지 않았을까요. 노랫말은 결코 아니지만요.


아무쪼록 제 평생 최고의 크리스마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솔직히 상상도 못 했어요. 크리스마스는 일 년 중 가장 바쁠 때라며 호스트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라고 들은 적 있었거든요. 비유하자면 설 명절 때 외국인이 한국인 호스트를 구하는 것 아니겠어요? 다들 고향에 간다고, 일가친척을 만난다고, 혹은 여행을 떠난다고 정신없잖아요.


용케도 호스트를 만났습니다.

어느 스위스 가정에서 진짜 나무를 베어 두고는 촛불을 붙여 크리스마스를 맞이했죠.


시간이 지나 감각이 무뎌진다 해도 이 기억만큼은 제 마음속에 영원히 타오를 것입니다.



TIP 

- 고마운 외국인을 만났다면 그들의 한글 이름 써주는 거 정말 추천드립니다. 솔직히 우리들한테는 별 것도 아닌 일이 잖아요? 이름이 무엇이냐고 거듭 물어보면서 한 사람의 이름을 기억하기도 쉽고요.

또, 막상 외국인 이름을 발음하기 어색해요. 이상한 발음에 외국인 친구는 웃고, 저도 웃고 그런 거죠. 이름 자체를 써주는 것도 감동적이지만, 그 이름 하나로 잠시나마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게 더 좋습니다.



혹시 질문이나 제가 도와드릴 일이 있다면 인스타그램이나 이메일, 댓글로 남겨주세요.

낮은 자세로 항상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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