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없습니다

어제의 나는 없습니다

by HAN

장난스레

옆으로 바라봐도

사랑이 흐르던 눈은

이제 없습니다

핀잔에 귀를 막고

하찮은 소리에

설렜던 귀도

이제 없습니다


가난을 맡지 못

음식 냄새에

행복했던 코도

이제 없습니다


삐죽여도 귀엽고

깔깔거리며

예쁘게 웃던 입도

이제 없습니다


그저

뭔지 모를

아련함만

남아있습니다


시간의 흐름은 일종의 이별인지도 모른다. 어제의 모습은 이제 없다.

알지 않아도 되는 걸 알게 되고, 놓지 말아야 할 것을 놓아버린다. 그래도 남는 게 있다면 사랑이 지나간 자리다. 그때 받았던 느낌, 생각, 마음. 왜곡된 마음의 표현조차 언젠가는 자리를 잡는 사랑.

그래서 사랑하고 사랑받아야 한다. 그 힘으로 살아가야 하니까.




지역에서 하는 공감글판 문안 공모를 보고 작년 가을에 썼던 글들을 다시 봤다.


가을이다. 갈대가 바람에 흔들린다.

흔들리지 않는 갈대는 어떨까?

이런 생각을 하며 사진에 썼었다.

네가 멋진 건 흔들리기 때문이야.


이 글을 살려 보려고 애쓰면서 의문이 들었다. 과연 그럴까? "멋지면 네가 갈대해"라고 했을 때 "그래"라고 답할 수 있을까?


흔들리는 건 낭만적이지 않다. 3년 전쯤 난 이런 글을 적었었다.

'그동안 괜찮았던 게 아니라 나는 울면서 오랜 시간 바라보고 있었던 거라고'

나의 말이 나도 미처 모르고 있던 내 마음을 바라보게 한다.

그리고 끝에는 이렇게 썼었다.

힘겨운 삶을 사는 모두에게 친절하라고 외치는 영화 원더가 생각난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두가 힘겹기에, 서로에게 힘과 위로가 되는 삶이길. 그 테두리가 점점 넓어지길 소망한다.


난 내가 쓴 이 글을 보면서 흔들림 앞에 함부로 멋지다는 말을 쓰지 않기로 했다. 갈대는 흔들리면서 멀미가 날지도 모른다. 한편 남편의 사업 때문에 경제적으로 불안정했고 우울했던 시기에도 같은 결론을 내리는 내가 우습기도 했다.


나는 지난 시간을 남편과 함께,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느린 걸음이지만 슬픔 가운데 기쁨을 찾으며 잘 걸어왔다. 그게 가능했던 건 내가 신을, 신의 선하신 계획을 믿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지금처럼 걸어가려 한다.

그러다 보면 어제의 싱그러운 나는 없겠지만 좀 더 성숙한 내가 있을 거다.




비가 많이 온 지난 화요일, 열이 오르락내리락하는 원인을 모르겠다고 아빠가 계시는 요양병원에서 언니에게 전화를 했었다. 치료받던 병원에서 검사를 받으시는 게 좋겠다고. 언니는 급하게 아빠를 치료받던 병원 응급실로 모시고 가느라 여기저기 연락을 하고 비를 맞아가며 분주했다.

난 늦게 알았고, 저녁 늦게 언니 혼자 빗길을 운전해 오는 게 걱정돼 급하게 병원으로 향했다. 전철을 타고 보니 핸드폰 배터리가 30프로 밖에 없었다. 2시간가량 걸릴 텐데 핸드폰도 못 보고 어떻게 할까 생각하다가 글을 생각하고 최대한 배터리를 아껴가며 짧은 글을 썼다.


제목은 다 짝사랑이다.

1. 널 향한 그리움이

검은빛이라면

차라리 눈을 감자

망했다

눈을 감으니

온통 검은빛이다


2. 라일락 꽃 향기가 유혹해도

난 네가 생각나지 않는다

비염이다

망했다

약을 먹었구나

약효가 이렇게 좋을 줄이야


3. 날 따라오는

달님의 환한 미소에

네 얼굴이 있다

망했다

터널이다

가도 가도 터널이다


4. 실실 웃는

키 큰 녀석은 싱겁다

나는 널 잊기로 한다

망했다

행사장 입구의 긴 다리 풍선들

해맑다


이 글을 쓰느라 갈아타야 할 정거장에서 내리지 못하고 한정거장을 더 갔다. 대신 갈아타면서 뛰었다~^^

이 상황에 이런 글이라. 나 미치지 않았다. 집에서 나오기 직전 원태연시인이 나온 프로를 봐서 이런 발상을 한 거 같다. 레트로 감성.


자정이 넘어 아빠가 병실로 올라가시는 걸 보고 언니와 함께 수다를 떨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아빠는 검사결과가 좋으셔서 다음 주 다시 요양병원으로 가신다.


아빠가 편찮으시고 나서 병원으로 가는 길은 나에게 여행이다. 힘들기도 하고 기쁘기도 한 여행. 난 그렇게 삶을 배워가고 어제의 나를 벗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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