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30대가 20대보다 서글프지 않은 이유
" 이번 주는 어땠어요? 괜찮았나?"
오늘도 윤쌤은 이렇게 안부를 묻는다. 나는 자주 울음으로 답했고, 아주아주 가끔 "별 일 없었어요"라는 말로 내 일주일을 전했다. 윤쌤은 내가 7개월째 매주 한 번, 많으면 두 세번을 만나고 있는 정신과 전문의다.
윤쌤의 병원은 회사에서 걸어서 3분 정도 걸리는데, 내가 회사 동료들과 자주가는 마라탕집 바로 옆에 있다. 1년을 넘는 시간 내내 그 집에서 마라탕과 마라샹궈, 꿔바로우, 계란볶음밥으로 월급을 탕진하면서도 그 옆에 정신과가 있는 줄은 모르고 살았다. 지난 가을, 도저히 떨리는 손과 흐르는 땀이 주체가 되지 않아서. 흔들리는 꽃잎에도 소스라치게 놀라는 심장과 전속력으로 뛰어대는 가슴이 도저히 진정이 되지 않아서 출근하자마자 회사 근처의 정신과를 찾기 전까지 내 최애 마라탕집 옆집이 정신병원인 줄은 몰랐다.
"아무래도 너 공황인 것 같아. 병원 한 번 가보자."
쑹과 함께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그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상황을 무방비하게, 하필이면 친구와 함께 있을 때 마주했다. 또 다시 정신이 아득해지고 심장이 미친듯이 널뛰기 시작했다. 머리가 빙빙 돌고 땅이 꺼지고 건물이 기울어졌다. 온 몸이 떨리고 숨이 가빠왔다. 내 옆에 친구가 있는 지, 윗층 아저씨가 옆집 여자애가 날 동물원 원숭이처럼 구경하고 있는 지 따위는 잊은 지 오래다. 두려움에 벌벌 떨다 출동한 경찰 뒤에 꼭꼭 숨었다.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를 부여잡듯 경찰관의 허리춤을 양손으로 꽉 쥐고 횡성수설 튀어나오는 말을 기어가는 목소리로 염불외듯 읊어됐다. "무서워요" "제발 절 가려주세요" "저 사람이 절 못 보게해주세요" "도와주세요" 무자비한 공포에 깔아뭉개진 난 인간의 존엄성을 잊은 동물에 가까웠다. 미디어에서 소비되는 공황발작(가련한 주인공이 쭈구려 앉아 떨고 있는 애처롭지만 예쁘게 포장된 이미지)과 달리 현실은 추하고 수치스럽다.
외국에서는 내과를 가듯 정신과를 간다더라, 현대인은 누구나 졍신병을 앓고 있다더라. 나 또한 잘도 지껄여댄 말이었다. 감기에 걸리면 병원에 가듯 마음이 아플 때도 병원에 가야 한다는 걸 알고는 있었다. 지금의 내 상태가 누군가의 도움이나 약물치료 없이는 일상생활이 어렵다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버티고 버티다가 넉다운 직전에서야 병원을 찾았다. 그래도 감사하다. 죽음의 문앞에 숱하게 서있었지만 그 문을 열지 않고 난 아직 살아있으니까. 그리고 또 감사하다. 내 옆에는 내 불행과 슬픔을 외면하지 않고 눈물을 닦아주는 걸로도 모자라 내 목덜미를 질질 끌고 가더라도 악착같이 날 포기하지 않는 사랑하는 이들이 있으니까.
나이 드는 게 싫다는 사람 앞에서 굳이 아닌데?라고 반문하지는 않지만, 나의 30대가 항상 나의 20대보다 서글픈건만은 아니다. 30대가 되면서 불행을 터 놓아도 되는 안전한 관계가 더 명확하고 더 굳건해졌다. 갑자기 야반도주해도 꼬치꼬치 캐묻지 않고 현관 비밀번호를 알려주는 친구가 있고, 같은 정신병원을 공유하고 나만큼 놀랐을 내 가족을 나 대신 찾아가 위로해주는 친구도 있다. 홀로 밤을 지새우고 인터넷으로 서치하며 지식인의 해결법에 목매지 않고 당당히 의사나 변호사를 찾아가 도움을 청하고 의뢰하는 노련함이 생겼다. 딱딱해진 굳은살과 꽤 단단한 맵집 덕분에 불행을 더 담담하게 마주하고 행복에 집착하지 않게 되었다. 여전히 서글프고 우울하고 밤마다 지구가 터져버리길 기도하지만, 서른 언저리에서 나는 아주 조금은 더 편안해졌다.
"이번 주는 어땠어요?" 진료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윤쌤이 어김없이 나의 안부를 묻는다. "이번 주는 괜찮았어요. 여전히 악몽을 꾸지만 잠도 꽤 잘 잤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