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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ㅇㄱㅁ May 27. 2021

결국 바지를 열고 출근했다

가진 게 뱃살뿐이라고 우울해말고, 강아지랑 산책해야지


출근 전날 밤에 미리 다음날 입을 옷을 꺼내 놓고 잠드는 게 나의 나이트 루틴이다. 뭐 거창하게 입는다는 게 아니라 미리 입을 옷을 정해두지 않으면 아침에 꼭 늦장을 부리다 지각하는 일이 빈번해서 직장생활을 하면서 생긴 습관이다.


날이 따뜻해진 만큼 이제 봄옷을 꺼내 입어야 할 것 같아서 오랜만에 발목까지 오는 흰색 롱셔츠와 얇은 남색 면바지를 준비해두고 잤다. 화장은 대충 얼굴에 파운데이션을 펴바르고 눈썹만 그리는 정도라 미리 옷만 준비해두면 출근 준비로 대략 15분 정도 밖에 걸리지 않는다. 그 말은 즉 출발하기 15분 전에 일어나 빠듯하게 출근 준비를 한다는 뜻이다. 서둘러 세수를 하고 화장을 한 뒤 바지를 입었는데 당황스러웠다. 바지의 단추와 단추구멍이 전혀 만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둘은 짝궁인데, N극과 S극처럼 잠그려고 당기면 튕겨지고 또 땡기면 튕겨서 나갔다. 젠장, 앞으로 남은 시간은 4분. 마저 옷을 입고 양말을 신고 가방과 핸드폰을 챙기고 마스크를 쓴 후 신발까지 신어야 한다. 지체하는 순간 지각이다. 팀장에게 월요일 아침부터 잔소리를 듣는 일 따윈 절대 만들고 싶지 않다. 결국 바지를 열고 출근하고 말았다. 어짜피 셔츠가 길어서 바지가 열려 있는지 따위는 보이지 않고, 뱃살에 허리가 꽉 껴서 단추 없이도 단단하게 고정된 바지는 벗겨질 염려도 없다.


서른이 넘으면 그럴싸한 커리어우먼으로 집과 차 정도는 갖추고 있을 거라고 믿었다. 10대 시절, 친구와 노는 시간보다 드라마 보는 시간이 더 많았는데 지금 내 나이 또래인 극 중 주인공들이 모두 다 그랬으니까. 얼마 전 드라마 '커피프린스 1호점'을 다시 봤는데 서브 여주인공의 끝판왕이라고 불리는 유주언니(채정안 분)가 29살인 걸 알고 뒷통수를 얻어 맞은 기분이었다. 적어도 서른 후반은 되겠지 했는데 29살이라니. 글로벌한 프로젝트에 참여하며 팀을 이끄는 성공한 화가라는 설정에 비하면 너무 말도 안되게 어린 거 아닌가. 작곡가이자 음악감독으로 스튜디오를 운영하며 부암동 전원주택에서 혼자 사는 한성오빠(이선균 분)가 31살이라는 설정은 또 어떻고. 해봤자 겨우 10년 조금 더 된 드라마인데 나이에 대한 사회적 감각이 이토록 다르다니 새삼 놀랍다. 아니면 다들 이 나이쯤에는 유주언니나 한성오빠처럼 커리어도 자산도 대단한데 나만 이모양 이꼴인 건가.


32살, 얻은 건 뱃살과 노화뿐이다. 8년 전 1800만원으로 시작한 연봉은 5번의 이직을 거치고 거쳐도 웬만한 기업의 초봉도 미치지 못한다. 대리 나부랭이라 프로젝트를 이끌긴 커녕 위에서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열외되기 쉽상이다. 20대 내내 추가 수당 한 푼 받지 못하고 해댄 야근 때문에 지금 체력은 바닥. 운동을 해야지 해야지 하지만 퇴근 후에 누워서 앓는 소리만 내는 저질 체력으로는 운동할 엄두도 안 나고 비싼 수강료는 겨우 붙잡은 의지도 꽁지를 감추게 만든다. 홈트를 하라고? 집에서 운동할 열정맨이었으면 나도 지금쯤 유주 언니처럼 성공하지 않았을까. 아 그러고보니 서른 언저리, 내가 얻은 게 또 생각났는데 쉬운 자기합리화와 부정적인 마인드다. 오. 마. 이. 갓.


체질상 살이 잘 붙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서른이 넘어가면서 체질도 변하는 지 갑자기 1, 2달 만에 살이 10키로 정도 불어났다. 이대로 그냥 살아도 볼까 했는데 몸이 무거워지니 체력은 더 딸리고, 만사가 모두 귀찮아지더라. 덕지덕지 붙은 지방의 양이 상당하니 옷도 다 작아졌고, 덕분에 큰 옷 사느라 안써도 될 돈까지 써야 해서 속까지 쓰리다. 빼야지 빼야지 하다가 결국 바지를 열고 출근하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이대로 가면 정말 진짜 큰일나겠다 싶어 날마다 회사에서 20분 정도 계단 걷기 운동을 시작했다. 우선순위 별로 업무를 정리하고 급한 업무를 처리하고 나면 보통 오후 3시라 그때부터 계단을 걷는다. 담배도 태우지 않으니 하루에 20분 정도는 자리를 비우고 잠깐 걷다 와도 괜찮다고 판단했다. 팀장이 나중에 뭐라고 하면 매일 하루에 열댓번 담배를 태우러 자리를 비우는 직원들이 있으니 논리적으로 항변할 수 있지 않을까 나름의 대책도 세웠다. 내내 자리만 지킨다고 업무 효율이 좋은 것도 아니고. 서른 언저리, 얻은 게 없다고 없다고 하더라도 이게 바로 8년차 직장인의 바이브가 아닐까. 업무의 우선순위를 정하고 스케줄을 조율하고 팀장에게 갖잖은 대꾸도 할 수 있다니! 첫 직장에서는 상상도 못해본 일이다. 부당하고 억울해도 그저 참고 견디는 게 이기는 거라고 믿었던 그 시절을 견뎌냈기에 지금 계단을 걷는 여유를 부릴 수도 있다는 걸 안다. 그렇게 생각하니 안도의 한숨이 새어나온다.


비록 드라마  주인공처럼 대단한 커리어나 좋은 ,  명의의 집은 없지만 차곡차곡 나도 나만의 것을 쌓아가고 있다.  돈은 아니지만 경력을 인정 받아 차츰 연봉도 오르고 있고, 계약직 인턴에서 정규직 대리가 되어 있기도 하고, 나만의 콘텐츠를 만들겠다며 호기롭게 시작한 독립출판도 벌써 횟수로 3년째다. 불행을 믿고  놓을  있는 친구도 얻었고, 좋은 길로 인도해주는 멋진 선배도 옆에 있다. 슬픔과 아픔에 부끄러워하지 않고 도움을 요청할 용기도 생겼고, ! 얼마 전에는 사랑스러운 반려견 블리도 입양했다. 내가  이외에 생명체를 책임질  있을 만큼 성장했다니! 생각해보니 나도  많은  얻었다.  정도면 뱃살과 노화 말고도 가진  많다고 해도   같기도 해서  주름에도 자부심이 생긴다.


서른이 넘으니 점점 더 내가 가진 것과 가지지 못한 것을 체크하고 안 그래야지 하면서도 남과 비교하게 된다. 결혼해서 34평 아파트를 사고 인테리어에 7천만원을 썼다며 3D 도식화를 보여주는 친구와 얘기하다보면 나는 이 나이가 되도록 결혼도 못하고 돈도 없다는 상실감과 패배감에 불필요한 자기연민에 빠진다. 중요한 건 그때 기죽지 말고 내가 가진 것의 가치와 소중함을 깨내드는 것이다. 예를 들면 어제 퇴근길에 동생이 블리와 함께 날 마중나왔는데, 내 목소리를 듣자마자 토끼처럼 귀를 휘날리며 뛰어와 내 무릎에 손을 얹고 캥거루처럼 깡깡 뛰던 블리를 떠올리는 거다. 중성화도 끝냈고 사상충 주사도 항체 검사도 모두 끝냈으니 이제 블리와 이 두둑한 뱃살을 빼러 밤바다 뜀박질이나 해야겠다. 올 여름엔 작년에 사둔 크롭티 입고 블리랑 호캉스나 가야지. 오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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