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약을 한 지 며칠이 지났더라.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애인과 왜 헤어졌더라. 모르겠다. 뭘 먹었는지 기억도 나질 않는데. 잠을 잤던가. 모두가 잠든 시간에 게임을 했던 것 같다. 아이유의 ‘어젯밤 이야기’를 틀면서 게임 몬스터를 잡았다. 어젯밤에 난 네가 미워졌어. 어젯밤에 난 네가 싫어졌어. 빙글빙글 돌아가는 불빛들을 바라보며 나 혼자 가슴 아팠어. 내 친구들이 너의 손을 잡고 춤출 때마다, 괴로워하던 나의 모습을 왜 못 보았니. 내겐 미워할 명분이 필요했다. 부모님을 미워하기엔 감당이 되지 않아 너를 미워해버렸다. 맞아, 나 너 그때 미워했었지. 네가 영화를 찍겠다고 나서고 다녔지. 네 친구들이랑 놀겠다며 내가 외로워하는 걸 지켜만 보고 있었지. 묻어두었던 과거를 굳이 꺼내 가면서 너를 미워하려 애썼다. 왜일까. 너는 그때 나를 지키겠다며 싫어하는 아르바이트까지 하면서 나를 먹여 살렸는데. 죄책감을 지우고 싶어서일까, 그럼에도 네게 서운한 게 남아서일까. 결국 나는 변한 게 없었다. 또 도망쳐버렸다. 미안하단 말로는 치울 수 없는 짐이 생겨버린 나는 네게서 도망쳤다. 태호에게나, 너에게나 나는 할 말이 없지.
차라리 나를 욕해주었으면. 너한테서 오는 전화를 받질 못했다. 때마침 나를 좋아하는 애가 있었고, 고백을 받았고, 나는 살아야 하니까 나를 챙겨줄 사람이 필요했고, 다른 이와 연애를 했다. 비겁함의 연속이었다. 다행히 그 애는 나를 몰랐다. 사실 관심이 없어서 모르겠다. 걔가 나를 알았나? 몰랐나? 어쨌든 우리는 연애 놀음을 했고, 재미는 없었지만 재미있는 척을 하면서 관계를 이어갔다. 다행히 이런 내게 호의를 품는 사람은 꽤 있었다. 낯선 지방이었지만 나는 술을 먹고, 게임을 하고, 사람을 만나면서 삶을 이어갔다. 굳이 그렇게.
술을 먹을 때면 그 애는 내게 말했다. 아빠한테 다시 연락하라고. 정말 후회하지 않겠냐고. 그러면 그냥 웃었다. 네가 뭔데 그런 말을 하냐고 묻지 않고 웃는 얼굴로 그냥 넘겨버렸다. 그 애는 내가 진지하게 듣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더 정확하고 직접적인 단어로 나를 설득하려 했다. 아빠가 죽었을 때, 후회가 됐어. 아빠를 미워했지만 아빠의 장례식에 가는 건 다른 문제더라고. 너는 후회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나는 고민했던 것 같다. 후회할까. 후회하지 않을까. 아빠는 나한테 그만한 잘못을 했던가, 하지 않았던가. 어찌 되었건 미래의 내 심정을 파악하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기에 나는 후회하지 않는 것을 택했다. 아빠한테 다시 연락을 했다. 의외로 아빠는 내 연락을 잘 받아주었다. 돈 때문에 아빠가 나를 부담스러워할까 봐 두려웠다고 말했고, 연락이 끊기는 게 무서워 다시 아빠한테 전화를 걸었다고 말했다. 아빠는 애써 나를 위로하려고 했고, 나는 잠시 울었다가 그렇게 다시 아빠와 연락을 주고받게 되었다. 응, 그게 끝이었다. 뭐가 더 없었다.
암전된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기분이었다. 주위에 아무도 없었고, 의미도 없었고, 정말 모든 것이 굳이, 로 시작되었다. 굳이 밥을 먹어야 할까, 굳이 잠을 자야 할까, 굳이 내가 살아야 할까. 너는 알고 있니?
물어보고 싶을 때가 많았으나 그 누구에게도 묻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서 누구한테 의지하긴 죽기보다 싫었다. 전화를 걸고 싶었으나 연락할 사람이 별로 없었다. 있었으나 하지 않았다. 웃음으로 넘기고 싶었다.
그러니까 아무것도 묻지 말고 농담 따먹기나 하자.
내가 밥을 먹지 않자 사람들이 밥을 챙겨주었다. 내가 잠을 자지 않자 밤에 연락하며 놀아주는 사람들이 생겼다. 미성년자 때와 다를 게 없었다. 한심하고 비겁한 일상의 나날. 그렇게 쓰레기같이 하루를 보내는 와중에 네게 연락이 왔다. 첫 연락은 돈이었다. 굳이 내게 보낸 네 돈을 보면서 나는 잠시 멍해져 있었다. 헤어진 애인에게 왜? 이해할 수가 없었다. 너한테 전화를 걸어 왜 그랬냐고 묻자 너는 그냥 제발 받아달라면서 울고 있었다. 왜. 나라면 그러지 않을 것 같은데. 너는 제발 잘 살아달라고 말했다. 병원에 꼬박꼬박 가면서 살아있어 달라고. 그러고 괜찮아지면 다시 네게 연락해달라고. 안타깝게도 모질었던 나는 네게 욕을 하면서 다시 우리 사이의 이별을 알렸다. 그러고 네게 편지가 왔다. 처음에는 끊기지 않는 연락이 무서웠는데 네 편지를 읽자 아무 생각도 들지 않게 되었다. 너는 우리의 추억에 대해 말했다. 네 잘못에 대해 얘기했고, 네가 못 해준 것에 대해 아쉬움을 남기며 그렇게 나를 떠났다. 나는 뭘 했더라. 게임을 했다. 생각이 복잡한 날에는 소주에 깔라만시를 타 먹으면서 키보드를 두들겼다.
키보드를 두들길수록 내 뇌도 두들겨 맞는 기분이 들었다. 차라리 나를 때리지. 그게 나았을 것 같다. 왜 나를 못 잊지? 이해하지 못할 것들이 너무나 많았다.
미안해. 내가 사랑받은 적이 없어서 그랬다. 내가 사랑에 대해 잘 몰랐어. 분명 이렇게 헤어지면 네가 나를 욕하며 떠날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나는 그냥 개새끼가 되고, 너는 그 안온한 자리로 다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내가 너무 사랑에 대해 몰라 생긴 일이었다. 내 그 안일한 마음에 욕을 해줘도 좋은데 너는 그러지 않았다. 내가 네게 다시 찾아갔을 때, 오히려 너는 왔으면 됐다고 말하며 같이 울어주었을 뿐이었다. 도대체 왜. 너는 왜 나한테 그렇게까지 해주었던 걸까. 사랑하니까 그런 거겠지. 내가 너무 사랑에 대해 몰랐다. 사랑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았으면 네게 그러지 않았을 텐데. 이미 미안하단 말로 안 된다는 것을 안다. 신뢰가 깨졌고, 내가 언제든 너를 버릴 수 있다는 충격을 주고 난 뒤였다. 너는 툭하면 떨곤 했다. 내가 다시 너를 버릴까 봐, 언제든지 너를 가볍게 떠날까 봐, 너는 무서워하면서 나를 안아주었다. 네가 무서워하는데 나를 왜 안아줘.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게 사랑인 건데. 미안해. 그러니 이제 내가 책임을 져야 했다.
처음 할 일은 간단했다. 다시 병원에 갔다. 내 증상에 대해 솔직하게 말하며 어떤 심정으로 살았는지 말을 꺼내놓았다. 내 이야기를 하는 것은 여전히 고역이었다. 감정을 직면하는 것도, 남에게 나를 설명하는 것도 전부 다 생리적 거부감이 들었다. 다행히 네가 내 옆에 있어주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너는 병원에서도 내 옆에 앉아 말을 나눠주었다. 간혹 내가 설명하기 어려워하면 네가 끼어들어 의사 선생님께 내 얘기를 해주곤 했다. 완치하는 것은 너무나 먼 일이지만 호전되는 것까지는 의외로 간단했다. 약만 잘 먹어도 됐다. 마음이란 것이 호르몬의 영향과도 가깝기 때문에 안정제를 먹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되어주었다. 밤이 되면 수면제를 먹었다. 아침이 되면 안정제를 먹었다. 밤낮이 생기는 것만으로도 많은 게 달라졌다. 그래서 다시 일을 구할 수 있게 되었다.
사람들 사이에 껴서 일을 할 수 있게 되자 뭔가 안심이 되었다. 나는 아직 사회의 일원이야. 소속이 주는 안정감은 다행히 내게 위로가 되어주었다. 일을 갔다 오면 집엔 네가 있었다. 우리는 같이 미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때 실행시키지 못한 미래에 대해 말하며 여러 방법에 대해 알아보았다. 언쟁이 오가는 일도 많았지만 그럴 때면 너는 먼저 내게 사과하며 끝내 안아주었다. 갈등엔 이해가, 잘못엔 사과가 필요하다는 것을 내가 몰랐던 탓이었다. 그렇게 너는 내게 관계에 대해 알려주었다. 그런데도 너는 나를 탓하지 않았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일단, 제일 먼저 할 수 있는 일은 너를 쉬게 하는 거겠지. 아르바이트에서 정직원이 된 덕분에 돈 걱정을 하지 않게 되었다. 너는 편하게 휴식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되었고, 우리는 일주일에 한 번 손을 잡고 병원에 가서 의사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선생님, 우리는 나을 수 있겠죠. 의사 선생님께 묻진 않았다. 그냥 약이라도 잘 먹는 게 방법이란 것을 알았으니까. 이제는 정말로 내 병과 직면해야 할 때가 다가왔다. 나는 마주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