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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사막 Aug 19. 2022

EP05 구멍 난 풍선은 어디로

 내 안의 병과 직면을 결심한 순간, 코로나가 터졌다. 놀이공원에서 샌드위치를 팔던 나는 순간 멈칫했다. 인기 검색어 1위가 OO시 봉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앞엔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아이들이 줄을 서 있었고, 나는 웃는 얼굴로 각자의 취향을 물으며 샌드위치를 만들 수밖에 없었다. 놀이공원 안은 잠시 혼란으로 가득했으나 꿋꿋이 운영되었다. 아이들의 수가 줄어듦에 따라 가게 내의 아르바이트생 수도 줄어들었다. 직원들끼리 어떻게든 해보겠다며 머리를 맞대고 아르바이트생 스케줄을 짰고, 발주를 넣을 때마다 전염병 사태가 얼마나 갈지 몰라 메뉴를 줄이기 시작했다. 갑자기 일어난 전염병 사태에 모두가 불안해했으나 오히려 나한텐 기회가 주어졌다. 곧이어 놀이공원이 폐쇄되었고, 유급휴가가 지급되었다. 오로지 애인과 같이 있을 수 있는 기회였다.


 우리는 작은 원룸에서 서로에 대해 이야기했다. 나에 대해, 애인에 대해, 서로의 관계에 대해 알아갈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 나는 여태까지 하지 않았던 이야기를 네게 꺼내놓았다. 과거부터 지금까지. 부모님이 내게 어떤 식으로 대해왔는지, 내가 얼마나 사랑에 대해 불신하는지, 그리고 내가 뭔가 이상한 것 같다는 사실도. 말하고 싶지 않았다. 유년 시절 내내 이상하다는 말을 듣고 살아서일까. 이상하단 말을 죽기보다 듣기 싫어했다. 그런 내게 너는 ‘음, 이상한 거 맞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렇게 대놓고 말할 것이라고 상상도 못 했지만 오히려 이 편이 나았다. 그래, 이상한 거 맞나 보다. 혼자 고민하는 것보다 낫지.


 몇 개월간의 유급휴가가 끝나고 본사에서 사람이 왔다. 그날 드디어 근로계약서에 싸인을 할 수 있었고, 동시에 들은 것은 해고 사실이었다. 불안감에 정수리 위가 따가울 지경이었으나, 여태까지 힘들게 살아왔던 탓인가. 복이 터졌다. 실업급여로 받을 수 있는 돈이 900만 원 가까이 되었고, 주소지가 부모님에게 있었던 덕분에 만 24세 지원금도 받을 수 있었다. 실업급여에 지원금, 그리고 근로장려금까지 합쳐서 천만 원 정도의 돈을 오로지 휴식에 쓸 수 있게 되었다. 입시가 끝났음에도 나는 다시 과외쌤을 찾아갔다. 과외쌤과의 인연이 끊이지 않았음 하는 마음에 꾸준히 연락을 해온 덕분에 과외쌤은 이제 과외쌤이 아닌 언니가 되었다. 언니는 여전히 내게 힘이 되어주었다. 너는 쉬는 법을 몰라. 숨을 쉬어야 하는데 어떻게 쉬는지 모르는 애처럼 숨 막혀하는 것 같아. PTSD 치료를 받아보는 게 어때?


 물론 대화엔 수많은 맥락과 설명이 있었지만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너무 먼 단어였다. 멀고도 먼 단어같이 느껴졌다. 내가 PTSD라니. 그렇게 학대를 심하게 당했나? 차라리 등급제였으면 좋겠다. 명확하고 딱 떨어졌으면 좋겠다. 그럼 망설일 필요도 없을 텐데.


 처음 우울증 위험 진단을 받았을 때, 아빠한테 머리를 맞았다.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무슨 일이 벌어진 지 몰라 멀뚱멀뚱한 표정으로 아빠를 바라보았다. 그저 멍하니 고개를 들어 아빠의 행동을 눈에 담았다. 아빠는 피자 판으로 머리를 계속 후려쳤다. 네가 왜. 네가 도대체 왜. 무슨 말을 들은 줄도 모른 채 계속 맞고만 있었다. 왜 나는 맞았을까.


 아빠는 네가 잘못해서,라고 말했다.


 아빠는 네가 문제가 있는 아이라고 말했다.


 치료가 필요한 나는 과연 어떤 사람일까. 의문점은 많았으나 뭐 하나 편하게 물어볼 수 있는 게 없었다.


 그 순간, 과외쌤이 내 앞에 손바닥을 들이밀었다. 너는 울다가도 갑자기 멍을 때려. 감정을 밀어내는 것처럼, 아무것도 느끼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


 나는 알 수 없었다. 알 수 없었음에도 하나는 확실해졌다. 내게 치료가 필요하다는 것을.


 굳이 낯선 지방에 있을 필요가 없었다. 무엇보다 서울로 올라오고 싶은 마음이 커져갔다. 연고도 없는 곳에 살아가는 건 외로웠고, 친구들 모두 서울에 몰려있었다. 코로나 블루가 온 시점에서 내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환기였다. 그렇기에 하루라도 빨리 짐을 싸 서울로 올라갔다. 임상 심리상담에 안 좋은 기억이 있어서일까. 선뜻 바로 치료를 받는 게 무서웠다. 기관을 알아보는 것도, 사람을 찾아보는 것도. 전부 피하고 싶은 일로만 느껴졌다. 무엇보다 가장 무서운 것은 비용이었다. 일주일에 십만 원에서 십오만 원. 그럼 한 달에는 얼마지? 사십만 원에서 육십만 원. 당장 내기엔 빠듯한 예산이었다. 조금씩 일하며 돈을 벌려고 했다. 당장은 힘들지만 여기서 일하다 보면 반년 뒤쯤엔 받을 수 있지 않을까. 당연하단 듯이 있었던 서울이었는데 우리에게도 적응할 시간이 필요했었다.


 PTSD 치료는 결국 받지 못했다. 여윳돈이 없는 상황에서 감당할 수 없는 비용을 안고 가기엔 힘들었다. 마침 또 기분이 괜찮은 것 같았고, 이번엔 내 멋대로 단약하지 않기로 단단히 결심을 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나는 매일 밤 자기 전이면 치료를 받는 내 모습을 상상했다. 무뎌진 감각을 끌어올리게 된 난 어떻게 되는 걸까. 원망을 멈추지 않게 될까, 새삼 억울해져서 온종일 울고 있을까, 지나친 증오가 감당이 되질 않아서 엄마나 아빠한테 화를 내게 될까. 무슨 상상을 해도 자연스러워 보였다. 그럼에도 그 끝에 있는 내가 상상이 되질 않았다. 치료를 받아야 하는 건 늘 알고 있지만 여전히 싫었다. 감정을 느낀다는 게 왜 내게 필요한 것인지 납득은 했으나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나는 감정이 싫은걸요. 기쁨도, 슬픔도, 즐거움도, 증오도 죄다 느끼고 싶지 않은걸요.


 서울로 이사 온 지 얼마 안 돼서 엄마가 오븐형 에어프라이어를 사주었다. 갑작스럽게 받은 선물이라 그저 빤히 보기만 했다. 그냥 지나가는 말로 한 소리였다. 본가에 있는 에어프라이어를 보고 와 좋겠다, 없어지면 저입니다!라고 했던 말인데 엄마가 바로 구매해서 집으로 보내버렸다. 그 선물에 보답하기 위해서 베이킹을 했다. 오늘 만든 쿠키! 친구들과 나눠 먹은 스콘! 그렇게 베이킹을 하다 보니 의외인 사실을 알게 되었다. 원래도 손재주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베이킹을 잘할 줄은 몰랐다. 초보치고는 솔직히 잘했다. 집에서 여러 가지 만들 수 있게 되자 달라지는 게 있었다. 무언가에 집중하여 손을 계속 움직이는 것도, 일단 굽다 보면 양이 많아져서 자연스레 사람을 만나게 된다는 점도, 정신 건강 재활에 큰 도움을 주었다. 왜 소년원에서 아이들에게 베이킹을 가르쳐 주는지 알 것 같았다. 할 일 있다는 것, 작은 성취를 쌓아가면서 누군가에게 선물을 줄 수 있다는 것. 그게 가장 사람을 건강하게 만들지 않을까.


  홈파티를 열었다. 체크무늬 식탁보를 깐 테이블에 구움 과자를 올려놓고 있자니 가만히 있어도 만족감이 들어 사진을 찍어대었다. 거기엔 모르는 사람도, 이미 알던 사람들도 있었다. 오래간만에 가지는 유쾌한 분위기에 기분이 환기되는 것 같았다. 우리는 이야기를 했다. 주제는 중요하지 않았다. 우리는 대화를 나누었다. 이 순간이 지나면 바로 잊어버릴 대화지만 그래도 기분이 좋았다. 그래, 내 기분이 좋으면 그걸로 된 것 아닐까? 한 달에 한 번씩 여는 홈파티는 내게 또 다른 성취와 고양감을 안겨주었다. 이번에는 건강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에 그 한 달이, 그 하루가 좋았다.


 모든 게 완벽해 보이지 않는가. 다정한 애인과 정상적으로 보이는 가족과 사람들 사이에 있는 나. 그렇다면 이제 다 끝난 거 같지 않을까. 내 우울도, 슬픔도, 증오도 다 무시하면 모든 것이 끝나지 않을까. 다 행복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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