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행하는 리추얼이 작가를 만든다
십여 년 전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부터 새벽 3시 기상을 유지해 왔다. 당시 2,3살이던 두 아이 때문에 낮에는 나만의 시간을 낼 수 없어 부득이하게 새벽 시간을 이용했다. 그 습관이 지금까지 유지되면서 이제는 새벽 3시가 혼자 몰입해 글 쓰기에 가장 좋은 시간에 되었다.
새벽에 눈을 뜨면 매일 반복해서 하던 일이 있었다. 누가 리추얼에 대해 가르쳐준 적이 없었음에도 본능적으로 알았던 모양이다.
1 커피를 한 잔 준비하며, 향기에 듬뿍 취한다
2 커피 잔을 들고 책상에 앉아 양초 하나를 켠다
3 이어폰을 꽂고 클래식 음악을 듣는다 (처음엔 바흐의 평균율 1번 프렐류드*만 들었다)
리추얼(ritual)의 사전적 의미는 (종교상, 제의적) 의례나 항상 규칙적으로 행하는 의식과 같은 일들을 말한다. 대단할 것 없는 일들이지만, 매일 같은 시간에 반복하니 일종의 의식이 되었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바흐의 평균율을 듣다 보면, 머릿속이 맑아지며 쓰고 싶은 문장들이 마구 떠올랐다. 내 몸은 여전히 이 세계에 있지만, 바흐의 평균율이 끝날 때쯤에는 내 마음은 이미 저 멀리 다른 세계로 들어가 있다. 내 소설의 캐릭터들이 살고 있는 세계로.
데이비드 베컴은 시합 전에 모든 물건을 일직선으로, 그것도 짝수로 배치하는 강박에 가까운 징크스를 갖고 있다. 류현진은 선발 등판해 승리한 경기 전에 먹은 음식을 시합 전에 항상 먹는다. 예를 들어 감자탕을 먹고 승리했다면, 다음 시합 전에도 감자탕을 먹는 것이다. 스포츠 선수들의 다양한 징크스와 행운의 부적이 실제로 선수들의 경기력을 향상해 준다는 연구결과들이 여럿 있다. 일종의 마인드셋 효과다.
위대한 작가들도 자기만의 리추얼이 있다. 독일의 시인이자 극작가인 프리드리히 실러는 썩은 사과를 책상 서랍에 넣어두고 코를 찌르는 그 향기를 들이마시면 적당한 단어가 떠올랐다고 한다. 영국의 시인 겸 비평가인 이디스 시트웰은 글을 쓰기 전에 열려 있는 관에 들어가 누워있다 나왔다. 프랑스의 여성 작가이자 배우였던 콜레트는 글을 쓰기 전에 고양이 몸의 벼룩을 잡는 걸 리추얼로 삼았다. 이 정도의 리추얼이라면 다른 세계로 들어가 몰입해 글을 쓰게 되는 것도 당연해 보인다.
심지어 빅토르 위고와 벤저민 프랭클린 등 많은 작가들이 알몸으로 쓸 때 최고의 작품이 나온다고 했다. 조르주 상드는 연인과 사랑의 행위를 한 뒤 바로 책상으로 직행해 글을 썼고, 볼테르는 연인의 벌거벗은 등을 책상 삼아 글을 썼다고 하니, 평범한 사람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지레 겁먹고 포기할 수도 있겠다.
리추얼이 꼭 특이하고 어려울 필요는 없다. 스탕달은 아침마다 프랑스 법전을 두세 페이지씩 읽었다. 프랑스의 대문호 알렉산드르 뒤마는 산문은 장밋빛 종이에, 소설은 푸른 종이에, 시는 노란 종이에 썼다. 미국의 시인 위스턴 휴 오든은 차를 엄청나게 마셔댔다. 글을 쓸 때마다 그전에 반복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 리추얼이 될 수 있다.
나는 이런 습관을 매일 별다른 변화를 주지 않고 반복한다. 그러다 보면 반복 자체가 중요한 것이 된다. 반복은 일종의 최면으로, 반복 과정에서 나는 최면에 걸린 듯 더 심원한 정신 상태에 이른다.
무라카미 하루키
리추얼의 효용에 대해 잘 알고 있었음에도, 한동안 리추얼을 지키지 못했다. 녹내장이 생기면서 커피를 끊자, 첫 단계인 커피 한 잔 준비하기부터 꼬이기 시작했다. 오래 지켜왔던 리추얼의 첫 단계에 금이 가자, 리추얼 전체가 와르르 무너졌다. 새벽에 일어나긴 해도 글쓰기로 들어가는 뚜렷한 시작점 없이 그저 주저앉아 시간을 뭉개는 일이 많았다. 좋은 글을 쓰지 못하는 이유가 리추얼이 사라졌기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리추얼의 역할을 무시하지는 못할 것이다.
다시금 글쓰기의 세계로 들어가는 나만의 리추얼을 재설계해야겠다.
1 따뜻한 차 한 잔을 준비한다.
2 디퓨저를 이용해 장미 향이 은은하게 퍼지게 한다
3 바흐의 평균율 1번 프렐류드*를 한 번 끝까지 듣는다
커피 대신 차로 바꾸고, 양초 대신 디퓨저 등을 이용해 장미 향으로 후각을 자극한다. 새 소리나 빗소리도 집중하는데 좋지만, 초심을 되살리기 위해 바흐의 평균율 1번을 듣기로 했다. 길지도 않아 글을 쓰기 직전에 들으며 마음을 정돈하기 좋다. 너무 복잡한 리추얼은 매일 시도하기 어렵고, 특히 집을 떠났을 때는 지키기 어렵다. 언제 어디서든 바로 글쓰기 모드로 들어갈 수 있는 간단한 리추얼이 좋다.
아직 글쓰기의 세계로 들어가는 입구를 찾지 못했다면, 자신만의 리추얼을 만들어 보면 어떨까.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곡집 제1권 프렐류드와 푸가 1번 C장조 BWV 846)
책 읽어주는 작가 윤소희
2017년 <세상의 중심보다 네 삶의 주인이길 원해>를 출간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06년부터 중국에 거주. ‘책과 함께’라는 커뮤니티를 운영하며 책 소개와 책 나눔을 하고 있다.
전 Bain & Company 컨설턴트, 전 KBS 아나운서. Chicago Booth MBA, 서울대학교 심리학 학사.
저서로는 <세상에 하나뿐인 북 매칭> <산만한 그녀의 색깔 있는 독서> <여백을 채우는 사랑>,
공저로 <소설, 쓰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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