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간로크_러시아
러이아 월드컵 대한민국-멕시코 전 티켓을 예매하고 에어비앤비로 근처 숙소를 알아봤지만, 예상대로 인근 숙소는 예약이 거의 다 찼다. 로스토프-온-돈에 남은 숙소는 모두 터무니없이 높은 가격대뿐이었다. 어쩔 수 없이 조금 떨어진 타간로크에 숙소를 정했다. 경기가 끝나고 이미 완전히 지쳐 있는 아이들을 데리고 8천 루블부터 시작하던 흥정이 2천5백 루블(한화 4만 4천 원 정도)로 마무리되었을 때, 겨우 택시를 탈 수 있었다. 조금만 가면 도착할 줄 알았던 타간로크는 캄캄한 고속도로를 무섭게 질주하던 택시로 한 시간 반 이상 지나서야 겨우 도착할 수 있었다. 때맞춰 억수 같은 비가 쏟아졌다.
비를 맞고 숙소에 들어서자, 거구의 빅토리아 아주머니가 우리를 따뜻하게 맞아 주었다. 우리는 러시아어를 몰랐고, 빅토리아는 영어를 몰랐지만, 구글 통역기의 도움으로 많은 이야기를 나눴고, 이틀 머무는 숙소에서 필요한 모든 정보를 얻었다. 아주 길었던 그날의 땀과 피로의 냄새로 얼룩진 옷을 세탁기에 그득 넣고 빨래를 돌렸다. 빨래를 기다리는 동안 빅토리아의 찬장을 하나씩 열어보았다. 낯선 이의 집에 머물 때, 가장 기대되는 것 중 하나는 그 집의 주인이 남겨 놓은 차를 찾아 만나는 일이다. 빅토리아의 찬장에서 라즈베리 향이 나는 새콤달콤한 차를 찾았다. 빅또리야가 우리 먹으라고 냉장고에 그득 담아 놓은 라즈베리를 꺼냈다. 빅토리아처럼 따뜻하고 라즈베리처럼 붉은 차 한 잔으로 타간로크를 만났다.
아이들과 여행을 할 때, 호텔에 머무는 대신 에어비앤비를 이용해 누군가의 집에 묵을 때가 많았다. 대부분 깨끗하고 좋은 집을 골랐지만, 가끔 아주 더러운 집이 걸리기도 했다. 집은 주인을 닮는다. 사람 좋고 친절해도 집안을 깨끗이 정돈하고 청소하는 데는 관심이 없는 사람이 있고, 바닥에서 빛이 날 정도로 깨끗하게 닦아 놓고 모든 것을 반듯하게 정리해야 마음이 놓이는 사람도 있다. 빅토리아는 따뜻하고 친절하면서도 지나치지 않게 청결을 유지하는 쪽이라 머무는 동안 마음이 편했다.
아, 좋다, 하고 감탄하고 잠자리에 눕자, 복병이 기다리고 있었다. 침대 가운데를 향해 미끄러지듯 쑥 꺼져 들어가는 낡은 침대 매트리스 덕분에 밤새 자는 동안 절벽에 매달려 떨어지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는 꿈을 꾸었다. 최대한 아래로 빨려 들어가지 않으려고 침대 가장자리에 매달리다시피 몸을 웅크리고 잤더니, 뒷목이 뻣뻣해졌다. 여행에서 고생은 언제나 달콤 씁쓸한 다크초콜릿의 ‘다크’, 즉 함량 높은 코코아다. 다크초콜릿을 즐기려면 씁쓸한 맛도 함께 누려야 한다.
다음 날 아침 밤새 쏟아지던 비가 멈출 생각이 없는지 계속 내렸다. 해가 나오기를 바라는 마음에 이름에 ‘sunrise’가 들어간 홍차를 골라 우리고, 빵과 치즈, 삶은 계란, 사과와 라즈베리로 아침을 먹었다. 케냐 홍차라 밀크티로 마시고 싶었지만, 우리가 우유일 거라 짐작하고 사온 팩에는 케피르라는 요구르트가 들어 있었다. 케피르는 단맛은 거의 없고 신맛이 강해 나는 맛있게 마셨지만, 아이들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묵직하고 진한 홍차와 시큼한 케피르를 번갈아가며 홀짝이는데, 이 맛도 꽤 괜찮다. 월드컵 경기장에서 관람하던 러시아 축구 팬이 우리 아이들에게 선물로 준 마트료시카 인형도 테이블에서 아침을 함께 했다. 다섯 개의 크기가 다른 마트료시카 인형은 벌써 이름을 갖고 아이들의 친구가 되었다. 타간로크는 이 아침식사처럼 소박하고 따뜻하다.
타간로크를 떠나는 마지막 날, 고리키 공원을 찾는데 역시나 언어가 말썽이었다. 시골 마을이다 보니 영어를 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고, 우리는 러시아어라고는 단어 몇 개밖에 몰랐다. 통역기가 쏟아내는 엉뚱한 말들 때문에 길을 물어보다 말고 쩔쩔매고 있는데, 갑자기 천사가 나타났다.
“고리끼 공원 가세요? 우리가 같이 가 줄게요.”
천사는 바로 우크라이나에서 왔다는 일리아나와 9월이면 다섯 살이 된다는 콘스탄틴. 고리키 공원까지 갈 필요가 없던 것으로 보이는데, 말로 설명하기 복잡한 그 길을 천사들은 우리를 위해 함께 걸어 주었다. 감사한 마음에 꼭 기억하고 싶어 함께 사진을 찍었다. 여행에서 아름다운 풍경을 눈에 담거나, 입에 살살 녹는 맛난 음식을 만나는 것도 기쁜 일이지만, 사실 이렇게 아름다운 사람들을 만나는 순간이 훨씬 기쁘다. 귀여운 콘스탄틴이 지금처럼 맑은 천사의 모습으로 자라나주길.
사실 타간로크는 어쩔 수 없이 머물게 된 곳이었다. 우리가 가길 원했던 곳은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금세 타간로크와 사랑에 빠졌고, 타간로크에 머물게 된 걸 감사했다. 두툼한 러시아 여행서를 몇 권 샀음에도 여행서 속에 언급조차 되지 않은 작은 시골 마을. 세월을 거슬러 오르듯 천천히 가는 낡은 트램처럼 우리는 공간 이동뿐 아니라 과거로 조금 시간 이동도 한 듯했다. 타간로크에 온 이후 우리는 모스크바처럼 큰 도시보다 이 작은 마을을 더 사랑하게 되었다. 안톤 체호프의 생가나 아름다운 흑해도 큰 역할을 했지만, 사실 그곳에서 만난 천사들 덕분이다. 집주인 빅토리아의 따뜻한 배려와 친절, 방황하는 우리를 위해 고리키 공원까지 함께 걸어준 일리아나와 콘스탄틴. 남은 평생 다시 오기는 쉽지 않아 보이는 이 작고 아름다운 바닷가 마을, 타간로크를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다. 빅토리아와 일리아나, 콘스탄틴이라는 이름과 함께.
빠까, 따간로크! (안녕, 타간로크!)
책 읽어주는 작가 윤소희
2017년 <세상의 중심보다 네 삶의 주인이길 원해>를 출간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24년 단편소설 '지금, 정상'으로 소설가 등단.
2006년부터 중국에 거주. ‘윤소희 작가와 함께 책 읽기’ 등 독서 커뮤니티 운영.
전 Bain & Company 컨설턴트, 전 KBS 아나운서. Chicago Booth MBA, 서울대학교 심리학 학사.
저서로는 <세상에 하나뿐인 북 매칭> <산만한 그녀의 색깔 있는 독서> <여백을 채우는 사랑> 등이 있고, 2024년 심리장편소설 출간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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