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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넓은 산에 '나를 위한' 나무 한 그루 못 심겠어?

[지금, 정상 9]

by 윤소희

('지금, 정상 1~8화를 먼저 읽으시면 좋아요)


WechatIMG8802.jpg 마침내 관악산이라고 새겨진 커다란 바위 앞에 섰다


마침내 관악산이라고 새겨진 커다란 바위 앞에 섰다. 30년 만에 올라온 정상. 줄을 서서 바위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는 사람들의 표정을 유심히 관찰한다. 사진 때문에 잠깐 짓는 억지 미소가 아니라 사진을 찍고 난 후 오히려 더 밝아지는 웃음. 30년 전 미진과 함께 여기까지 올라왔더라면 어땠을까. 미진도 돌아내려 가길 원했다고 믿었지만, 어쩌면 미진은 내 불편한 발을 나보다 더 염려했을 것이다. 미진과 나는 서로 괜찮다고 하면서도 풀이 죽은 표정으로 올라왔던 길을 터덜터덜 내려갔다. 발이 아프다, 피곤하다, 목마르다, 배고프다…… 떠오르는 모든 생각이 우리의 목을 졸랐다. 그 후 산을 싫어하게 된 건 어쩌면 중간에 포기했기 때문일지 모른다. 충분히 끝까지 해본 일은 후회를 남기지 않지만, 최선을 다하지 않은 일은 언제나 발목을 잡는다.


2.png 최선을 다하지 않은 일은 언제나 발목을 잡는다


시야가 탁 트이자, 체증이 내려간 듯 시원하다. 산에 오르는 동안에는 산 전체를 관망할 수 없었다. 가파른 오르막길이든, 계곡이든, 깎아지른 절벽으로 이어진 능선이든 바로 눈앞에 펼쳐진 산의 일부만을 볼 수 있었다. 아무리 아름다운 풍경이 있어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여유가 없었다. 정상에 오르자 앞을 가리던 모든 장애물이 사라졌다. 내가 오른 산뿐 아니라 옆에 이어져 있는 산들의 지형이나 멀리 서울 시내의 모습도 눈에 들어온다. 정상에 서자 비로소 조망할 수 있다. 이 나이가 되기 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분명 삶에도 있다. 언제나 눈앞에 닥친 문제를 보기에 급급했으니까. 코를 처박고 나무만 보다 이제야 숲 전체를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3.png 정상은 끝이 아니었다


정상은 끝이 아니었다. 삶도 전환점이 있을 때 비로소 시작되는 게 아닐까. 의도하진 않았지만, 정상에 올랐다.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는 지점에 와 있다. 미진의 손을 슬그머니 잡았다. 배낭을 내려놓고 미진에게 배낭 속을 보여준다. 미진의 눈동자가 커진다. 아까 날만 보였던 괭이와 장갑, 1리터짜리 물병, 그리고 뿌리 부위가 흙과 함께 비닐봉지에 싸여 있는 50센티 정도 되는 묘목. 뻐근한 어깨를 주먹으로 두드리는데, 미진이 목소리를 낮춰 묻는다.

어디다 심으려고?


실은 내가 묻고 싶었다. 산 정상에 오르면 나무 한 그루를 심어야겠다는 거창한 계획을 갖고 여기까지 끙끙대며 묘목을 짊어지고 왔지만, 막상 오르고 나니 막막하다. 정상에는 발 디딜 틈 없이 사람들이 오르내린다. 흙보다 바위가 많아 땅을 파기도 어려워 보인다.


4.png 다시 태어나는 기념으로 나를 위해 나무 한 그루 심고 싶었어요


산에 맘대로 나무 심으면 안 돼요. 관리 기관 담당자에게 미리 허가받아야지.


남자의 말을 들으니, 기가 더 죽는다. 어느샌가 네 사람이 얼굴을 동그랗게 맞대고 배낭 안에 담겨 있는 단풍 오동나무 묘목을 바라본다.


아이가 태어날 때 그 아이를 위해 나무 한 그루씩 심어주는 집안 이야기 혹시 들어보셨어요? 다시 태어나는 기념으로 나를 위해 나무 한 그루 심고 싶었어요.


한동안 세 사람은 말이 없다. 여자가 내 등을 두드린다.


6.png 설마 이 넓은 산에 나무 한 그루 못 심겠어? 같이 찾아봐요.
설마 이 넓은 산에 나무 한 그루 못 심겠어? 같이 찾아봐요.


왔던 길로 돌아내려 가려는 내 팔을 여자가 잡아끈다.


(다음 화에 계속)





WechatIMG8762.jpg 윤소희 작가

책 읽어주는 작가 윤소희


2017년 <세상의 중심보다 네 삶의 주인이길 원해>를 출간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24년 단편소설 '지금, 정상'으로 소설가 등단.

2006년부터 중국에 거주. ‘윤소희 작가와 함께 책 읽기’ 등 독서 커뮤니티 운영.

전 Bain & Company 컨설턴트, 전 KBS 아나운서. Chicago Booth MBA, 서울대학교 심리학 학사.

저서로는 심리장편소설 <사이코드라마>와 <세상에 하나뿐인 북 매칭>

<산만한 그녀의 색깔 있는 독서> <여백을 채우는 사랑>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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