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정상 8]
('지금, 정상' 1~7화를 먼저 읽고 오시면 좋아요)
커다란 바위를 감싸듯 돌아내려 가려던 세 사람이 일제히 뒤를 돌아 나를 바라본다. 한동안 침묵이 흐른다. 그냥 내려가자고 하면 못 이기는 척 따라 내려가려 했는데, 여자가 갑자기 배낭에서 뭔가를 꺼내 내게 건넨다.
암벽용 장갑이에요.
장갑을 받아 들며 애원하듯 미진의 얼굴을 바라본다. 같이 가자고 할 줄 알았지만, 미진은 어깨를 으쓱해 보일 뿐이다.
나보다는 당신이 에스코트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여자가 남자의 등을 민다. 나는 장갑을 끼고 암벽을 기어오른다. 경사가 90도일 리 없겠지만 내 눈에는 90도로 깎아 세운 듯 보인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튀어나온 부분을 골라잡고 한 발 한 발 내디딘다. 인생의 전환점인 정상에 올랐다고 해서 두려움이 사라지진 않는다. 내가 오를 수 있는 최고의 고도에 섰으니, 추락에 대한 두려움도 최고조에 이른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삶을 기대한다면 지금까지의 나라면 하지 않을 선택을 하는 수밖에 없다. 앞만 보고 매달리듯 기어 올라간다.
얼마나 지났을까. 평평한 바위 위에서 사람들이 앉아 쉬는 모습이 보인다. 절벽 위에 걸터앉아 산 아래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사람들도 있다. 낭떠러지 쪽에서 좀 떨어진 바위에 겨우 궁둥이를 붙이고 앉는다. 그제야 산 아래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올라오는 내내 내려다보면 아찔하고 어지러워 일부러 보지 않으려 애썼다. 암벽을 오르는 동안에는 심장이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뛰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잠잠해졌다. 무섭게 솟아있던 암벽이 내가 지금까지와는 다른 선택을 하자, 내 발아래 얌전히 무릎을 꿇는다.
보기보다 강단 있네요.
남자가 내게 처음으로 건넨 말이다.
올라갈 때는 좀 가팔라도 이렇게 빨리 올라갈 수 있는 길이 좋아요. 고통이 짧아야 포기를 안 하지. 반대로 내려갈 때는 우회로처럼 완만한 길이 좋고요. 무릎 안 나가고 안 다치려면 천천히 내려가야 하거든요.
남자의 말을 들으며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을 올려다본다. 남자가 내 등산화를 가리키며 괜찮은지 묻는다. 새로 산 티가 역력한 매끈한 파타고니아 등산화를 물끄러미 내려다본다. 뒤축에 물집이 잡혔는지 몹시 따갑고 아프다. 남들이 추천하는 좋은 등산화만 있으면 아무 문제가 없을 줄 알았는데, 그게 다가 아닌 모양이다. 남자가 시키는 대로 등산화와 양말을 벗는다. 남자가 내 발을 두 손으로 들어 올리더니 꼼꼼히 상태를 확인한다. 혹시 냄새가 나진 않을까. 얼굴이 붉어진다. 고개를 돌려 먼 데를 바라본다. 발뒤꿈치에 물집이 잡히고 엄지발톱 반 정도가 까맣게 멍들었다. 남자는 이런 일에 익숙한지 물집이 터진 부위에 거즈를 대고 자신이 가져온 기능성 양말을 신겨 준다. 염치없이 느껴졌지만, 전문가에게 얌전히 발을 맡긴다. 남자는 주름이 생기지 않도록 양말을 당겨 주고, 등산화가 너무 느슨하지 않도록 끈을 단단히 매 준다.
아팠던 부위가 한결 편안해졌다. 삶의 굽이굽이에 선물처럼 나타났던 좋은 인연들이 하나둘 떠오른다. 그저 때가 되고 나이를 먹어 저절로 정상에 오른 건 아니다. 대가 없이 건네준 크고 작은 도움을 받으며 여기까지 왔다.
마침내 관악산이라고 새겨진 커다란 바위 앞에 섰다.
(다음 화에 계속)
책 읽어주는 작가 윤소희
2017년 <세상의 중심보다 네 삶의 주인이길 원해>를 출간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24년 단편소설 '지금, 정상'으로 소설가 등단.
2006년부터 중국에 거주. ‘윤소희 작가와 함께 책 읽기’ 등 독서 커뮤니티 운영.
전 Bain & Company 컨설턴트, 전 KBS 아나운서. Chicago Booth MBA, 서울대학교 심리학 학사.
저서로는 심리장편소설 <사이코드라마>와 <세상에 하나뿐인 북 매칭>
<산만한 그녀의 색깔 있는 독서> <여백을 채우는 사랑>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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