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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또 그냥 내려왔네

['지금, 정상' 최종]

by 윤소희

('지금, 정상 1~9화를 먼저 읽으시면 좋아요)


왔던 길로 돌아내려 가려는 내 팔을 여자가 잡아끈다. 내려갈 때도 똑같은 길을 갈 필요는 없다고 하면서. 틀린 말이 아니다. 다른 선택지가 있다는 생각 자체를 해보지 못했을 뿐. 연주대를 넘어 과천향교로 가는 길은 계곡을 볼 수 있다. 최근 가물어 물이 많지는 않지만, 흐르는 물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주위를 살핀다. 나무 심을 자리를 찾아야 한다. 네 사람 다 두리번거리며 보이는 장소마다 품평을 한다.


2.png 등산화는 하산할 때 더 쓸모가 있다.


등산화는 하산할 때 더 쓸모가 있다. 내리막길에서 미끄러지지 않도록 발을 잘 잡아준다. 다리에 힘이 풀려 바위에 발이 부딪칠 때도 딱딱한 커버 덕분에 발이 상하지 않는다. 올라가는 길에 발에 물집이 잡히는 바람에 등산화도 소용없나 생각했지만, 기능성 양말로 갈아 신고 등산화 끈을 잘 매니 확실히 발이 편안하다.


어차피 내려올 산을 왜 올라가나 궁금했는데, 어쩌면 내려오기 위해 오르는 건지도 모르겠다. 정상에 오르느라 에너지의 절반 이상을 써버린 후라 걸음은 느려졌지만, 힘이 빠진 덕분인지 오히려 순간순간을 잘 누릴 수 있다. 올라갈 때는 눈에 잘 들어오지 않던 다른 사람의 모습도 잘 보인다. 앞서가는 사람들에게도 두루 시선이 간다.


3.png 내 고유의 빛깔도 이제 조금씩 드러나겠지


산에는 가을이 깊이 스며들었다. 나무들이 온몸으로 가을을 받아내고 있다. 타는 듯 뜨거운 여름 태양 아래서 사랑을 나눌 때는 잎파랑이들이 그 격정이 영원할 거라며 깝죽댄다. 그래서 한여름의 나무들은 그토록 짙은 초록이었다. 태양의 온기가 식으면 찬 기운에 약한 잎파랑이들이 죽고, 그에 가려있던 카로틴, 크산토필, 타닌 같은 색소가 드러난다. 단풍나무, 개옻나무, 붉나무, 화살나무의 붉은빛도, 은행나무, 칠엽수, 낙엽송의 노란빛도, 참나무의 갈색빛이나 거무죽죽한 회갈색도 마술처럼 한순간에 둔갑하듯 나타나지만, 이 가을은 문득, 갑자기 생긴 건 아니다. 봄여름 내내 잎파랑이 그늘에 묻혀 있던 것들이 이제야 드러난다. 그동안 젊음이라는 혈기 아래 묻혀 제대로 보지 못했던 내 고유의 빛깔도 이제 조금씩 드러나겠지. 비록 낙엽이 되어 떨어지기 직전 찰나의 시간일지라도, 나무들은 저마다의 빛깔로 반짝인다. 바람에 떨어지는 잎들마저도.


WechatIMG8803.jpg 오동나무


인적이 드문 길가에서 안으로 좀 들어간 곳에서 이미 다 자란 단풍 오동나무 몇 그루를 발견했다. 배낭을 열고 잔가지들이 부러지지 않게 묘목을 조심스럽게 꺼낸다. 장갑을 끼고 괭이를 손에 든다. 남자가 자기가 땅을 파겠다고 했지만, 내 손으로 하고 싶다. 어설픈 괭이질로 딱딱한 땅을 파내는 게 쉽지 않았지만, 한참 만에 겨우 조그만 구멍을 팠다. 단풍 오동나무 묘목 뿌리를 덮고 있는 비닐봉지를 뜯어낸다. 뿌리에 붙어 있는 흙이 떨어지지 않게 살살 달래며 파 놓은 구멍 속에 뿌리를 집어넣는다. 흙으로 남은 구멍을 메우고 커다란 생수병을 꺼내 뿌리 주위에 원을 그리며 물을 뿌린다.


5.png 순간 아랫배가 사르르 아프다


순간 아랫배가 사르르 아프다. 밑이 빠질 듯 불쾌한 느낌에 설마, 하는 순간 뜨뜻한 액체가 흘러나온다. 그 순간 미진과 눈이 마주쳤다.

아……, 또 그냥 내려왔네.
그게 무슨 말이야?


영문을 모르겠다는 미진의 얼굴을 보며 싱긋 웃는다. 잠시 건너편에 있다고 생각했던 미진과 나는 여전히 같은 길에 있다.




(지금까지 단편소설 '지금, 정상'을 읽고 사랑해 주신 모든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이건 드라마로 나와야만 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hL0tcx_LycE



WechatIMG8294.jpg 윤소희 작가


책 읽어주는 작가 윤소희


2017년 <세상의 중심보다 네 삶의 주인이길 원해>를 출간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24년 단편소설 '지금, 정상'으로 소설가 등단.

2006년부터 중국에 거주. ‘윤소희 작가와 함께 책 읽기’ 등 독서 커뮤니티 운영.

전 Bain & Company 컨설턴트, 전 KBS 아나운서. Chicago Booth MBA, 서울대학교 심리학 학사.

저서로는 심리장편소설 <사이코드라마>와 <세상에 하나뿐인 북 매칭>

<산만한 그녀의 색깔 있는 독서> <여백을 채우는 사랑>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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