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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가 그때 내 일기를 몰래 읽지 않았다면

100일 챌린지_Day 8

by 윤소희

8월 8일, 새벽 4시 18분.

오늘도 일어나자마자 문장을 써 내려간다. 100일 챌린지를 위해 다시 새벽에 글을 쓰는 일, 그것은 모닝페이지를 닮았다. 누가 읽을지 모를 글을 쓰면서도, 누구에게도 읽히지 않아야 할 이야기를 지키기 위해 손을 움직인다. 이 묘한 역설 속에서, 문장이 하나씩 어둠을 밀어낸다.


모닝페이지를 처음 만난 건 20대 중반, 부산 파견 근무 시절이었다. 방송국 아나운서로서, 서울에서보다 더 많은 방송을 소화했지만, 낯선 도시에서 홀로 보내는 여가는 매 마음을 조용히 갉아먹었다. 그 무렵, 줄리아 카메론의 『아티스트 웨이』를 읽었고, 눈 뜨자마자 석 장의 종이에 생각을 쏟아내는 ‘모닝페이지’를 시작했다.

단순한 의식이었지만, 그건 내 안에 잠들어 있던 나를 깨우는 주문이었다. 생각들이 잠옷 바람으로 종이 위를 걸었다.


WechatIMG9814.jpg 줄리아 카메론의 『아티스트 웨이』_ 20대 때 읽던 책은 사라졌고, 몇 년 전 다시 구매한 책


그 해, 나는 물 공포증을 딛고 수영을 배웠고, 작은 방에 이젤을 세워 유화로 새들을 그렸다. 회사 동료들과 아마추어 밴드 Y-NOT을 만들어 드럼을 쳤고, 카페 공연을 위해 6mm 카메라로 영상을 찍고 밤새 편집했다. 그 모든 창조의 불씨는, 모닝페이지에서 피어올랐다. 매일이 설렘이었고, 새벽은 기다려지는 시간이었다. 그때 나는, 다시 쓰기 시작한 사람이었다.


왜 나는 쓰기를 멈췄을까. 기억의 중심에는 오래전 일기장이 있다. 딸 셋 중 맏이였던 내게 갑자기 언니가 생긴 건 중학교 때였다. 도와주던 모녀 가정의 어머니가 세상을 갑자기 뜨게 되어, 부모님이 함께 키우게 된 나보다 세 살 많은 언니. 방을 나눠 쓰며, 처음엔 든든했고, 익숙해졌고, 어느 순간 불편해졌다. 그 불편함의 정체를 알았을 때, 나는 일기 쓰기를 그만두었다.


2.png 그날, 언니가 내 일기장을 읽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그 후로 나는 어떤 글도 100% 사실대로 쓰지 않았다. 누군가 들여다볼까 두려웠고, 들킨다는 것은 곧, 나를 잃는 일처럼 느껴졌다. 늘 한 줄쯤은 마음을 비껴 썼고, 다 쓴 일기장은 모조리 없애버렸다.


아마 그날, 나는 작가가 될 준비를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지금도 소설가란, 거짓말을 잘하는 사람이라고 믿는다. 진실을 숨기려는 게 아니라, 그 누구도 다치지 않도록 진실을 필터링하는 사람. 모닝페이지는, 그런 나에게 ‘괜찮다’고 속삭였다. 엉뚱한 상상, 말도 안 되는 고백, 거짓말 같은 문장들. 그 모든 것이 이 비밀의 방에선 허용된다. 읽히지 않을 자유, 읽혀도 전부 드러나지 않는 안전함. 그곳에서 나는 자유로웠다.


1.png 비밀이 없는 삶만큼 가난한 것도 없다. 하지만 비밀을 강제로 읽힌다는 건 폭력


모닝페이지는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글이 아니었다. 스스로도 알지 못한 나를 향해 쓰는 기도문이었다.

100일 챌린지를 하며, 다시 그 리듬을 되살리려 한다. 회복은 끝난 일이 아니라, 여전히 진행 중이다. 새벽의 문장들은 내 손을 잡고, 천천히 다시 돌아가야 할 방으로 나를 이끈다. 그곳엔 가공되지 않은 진실의 원석이 쌓여 있다. 비밀이 없는 삶만큼 가난한 것도 없다. 하지만 비밀을 강제로 읽힌다는 건 폭력이다.


나는 숨기려는 마음과 드러내려는 마음 사이,

그 경계 위에서 글을 쓴다.


가끔 생각한다. 그날, 언니가 내 일기장을 읽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아니, 그 사실을 내가 끝내 몰랐다면.

내가 작가가 된 건, 어쩌면 그 모든 우연한 배신 덕분이다. 덕분에 나는, 읽히지 않아야 할 이야기를 쓰는 법을 조금씩 배우고 있다.





WechatIMG9452.jpg 윤소희 작가

책 읽어주는 작가 윤소희

2017년 <세상의 중심보다 네 삶의 주인이길 원해>를 출간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24년 단편소설 '지금, 정상'으로 소설가 등단.

2006년부터 중국에 거주. ‘윤소희 작가와 함께 책 읽기’ 등 독서 커뮤니티 운영.

전 Bain & Company 컨설턴트, 전 KBS 아나운서. Chicago Booth MBA, 서울대학교 심리학 학사.

저서로는 심리장편소설 <사이코드라마>와 <세상에 하나뿐인 북 매칭>

<산만한 그녀의 색깔 있는 독서> <여백을 채우는 사랑>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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