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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대신 '잠'이 글을 써줄지도 몰라

100일 챌린지_Day 7

by 윤소희

글쓰기가 한창 잘 되던 시절이 있었다. 잠드는 시간조차 아쉬웠다. 내 안의 문장은 스물네 시간 깨어 있었고, 자꾸만 내게 말을 걸었다. 노트북을 덮고 불을 끄면, 어두운 방 안에서 개구리들이 합창처럼 다음 이야기를 외쳐댔다. 잠자리에 든 것이 아니라, 이야기의 강에 몸을 담그고 눕는 기분이었다. 꿈속에서도 글이 이어졌고, 새벽이면 밤새 내면의 조수가 자료를 정리해 놓은 것처럼 문장들이 줄줄이 흘러나왔다. 그 시절 나는 문장과 연애 중이었다. 서로 눈빛만 봐도 다음 말을 알았다.


2.png 잠드는 시간조차 아쉬웠다.


그때는 새벽 3시에 일어나는 일이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 오히려 알람보다 일찍 잠에 깨어 2시 반, 2시... 점점 더 이른 새벽으로 가던 나는, 커피 한 잔 내릴 틈도 없이, 노트북을 켜고 앉곤 했다. 의식과 무의식 사이의 좁은 틈에서 글이 솟아났다. 내가 글을 쓴다기보다, 눈앞에 쏟아지는 글을 주워 담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밀월의 시간은 영원하지 않았다.


요즘 나는 일어나기도 전에 좌절한다. 여전히 부지런하고 잠시도 쉬지 않지만, 쓰지 않는다. 그저 자판을 두드릴 뿐이다. 내 글을 쓰지 못한 날들이 쌓이고, 쓰려고 앉은 몸과 손끝은 무겁기만 하다. 노트북을 펴지 않는 날은 없기에, ‘나는 아직 쓰고 있다’고 착각하며 시간을 보냈다.


사랑이 식을 때, 연인은 곁에 있어도 설렘이 없다. 알람을 끄고 다시 눈을 감는다. 문장이 그리워 기상 시간을 당기던 나는, 반대로 알람을 늦추기 시작했다. 이제 새벽 4시가 되어야 겨우 몸을 일으킨다. 커피도, 음악도 끊었다. 나는 더 이상 나를 설레게 하지 못하는 연인을 미워하는 대신, 설레지 못하는 나 자신을 미워했다.


며칠 전, 살만 칸의 AI 책을 읽다 엉뚱한 문장에 멈춰 섰다. 그는 골치 아픈 일이 생기거나,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생기면 다 덮어두고 그냥 잔다고 했다. 자고 일어나면, 아침에는 실마리가 생겨 있다고 했다. 뇌의 일부는 자는 동안에도 계속 일을 한다. 뉴런이 하나 활성화되면 시냅스 강도에 따라 관련 뉴런들이 활성화되는데, 이런 일이 밤새 ‘수조’ 회 일어난다고 한다. 나는 그저 자고 일어났을 뿐인데, 무의식은 밤새 번뜩이는 통찰을 의식의 수면 위로 떠올린다.


문득 생각했다. 그 시절 내가 잘 쓸 수 있었던 건 혹시 잠이 나 대신 글을 써주고 있었던 건 아닐까?


나는 이제 쓰지 못하게 되었다고 생각했지만, 어쩌면 내 안의 작가는 지금도 끈질기게 글을 쓰고 있는지 모른다. 요즘 따라 꿈을 자주 꾼다. 강렬한 이미지와 컬러가 뇌리에 남는다. 그 조각들을 해석해 보면, 나는 이미 준비되어 있고, 시작만 하면 된다고 한다. 무수한 이야기가 내 안에 기다리고 있어, 끄집어내기만 하면 된다고—꿈은 말해준다.


3.png 내 안의 작가는 지금도 끈질기게 글을 쓰고 있는지 모른다.


지금 나는 담담한 기분으로 꼬물거리듯 글을 쓰고 있다. 챌린지를 위해서지만, 새벽에 일어나 앉았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비록 3시가 4시가 되었지만, 3시보다 4시가 덜 위대하다고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낮의 나보다 더 열정적인 밤의 나가 작업을 이어가고 있을 것이다. 무의식의 보고를 열고, 내가 회복되어 이어받아 줄 그날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오늘 새벽에도 개구리 한 마리 울지 않았다. 익숙해진 침묵 속에서, 천천히 한 줄을 써 내려간다. 콸콸 흐르지는 않지만, 이토록 건조한 문장도 분명 내 것이다.


4.png 요즘 따라 꿈을 자주 꾼다


100일 챌린지가 설렘을 얼마나 되돌려 줄지 모르겠다. 하지만 최소한, 쓰지 못하는 나를 덜 미워하게 되는 데에는, 분명 작게나마 기여할 것이다.


밀월이 지나야, 진짜 결혼을 배운다.

사랑은 설렘이 아니라, 꾸준함이다.

글쓰기도 그렇다.




WechatIMG9772.jpg 윤소희 작가


책 읽어주는 작가 윤소희


2017년 <세상의 중심보다 네 삶의 주인이길 원해>를 출간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24년 단편소설 '지금, 정상'으로 소설가 등단.

2006년부터 중국에 거주. ‘윤소희 작가와 함께 책 읽기’ '책과 함께' 등 독서 커뮤니티 운영.

전 Bain & Company 컨설턴트, 전 KBS 아나운서. Chicago Booth MBA, 서울대학교 심리학 학사.

저서로는 심리장편소설 <사이코드라마>와 <세상에 하나뿐인 북 매칭>

<산만한 그녀의 색깔 있는 독서> <여백을 채우는 사랑>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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