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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크기가 곧 나의 세계

100일 챌린지_Day 5

by 윤소희

귀가 아팠다. 왼쪽 귀에 통증이 간혹 느껴졌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사흘째 되자 참을 수 없는 통증에 병원에 갔다. 중이염일 거라 짐작했지만, 진단명은 ‘외이도염’이었다.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중이염일 거라 생각할 때는 욱신거리는 통증과 압박감이 강하게 느껴졌는데, 외이도염이라는 말을 들은 순간부터 귀가 간질간질해졌다. 진단명이 달라지자 감각도 달라졌다. 언어가 감각을 바꿔놓았다. (외이도염 증상에 가려움이 포함됨)


WechatIMG9783.jpg 강보라 소설집 <뱀과 양배추가 있는 풍경>


며칠 전 읽은 강보라 작가의 소설에도 비슷한 장면이 있었다. 와인 에듀케이터가 흙냄새, 정향, 육두구 향을 언급하자 화자는 그 향을 비로소 느낀다. 정향과 육두구가 어떤 향인지 몰랐음에도, ‘클로브’, ‘너트맥’이라는 단어가 만들어낸 후각적 심상이 순식간에 미각까지 장악한다. 소설 속 화자는 그 감각을 “언어에 속은 환각”이라고 말한다. 감각은 언어를 통과해야 비로소 인식된다.


1.png 감각은 언어를 통과해야 비로소 인식된다


그 말을 곱씹던 중, 이수정 작가의 북토크가 떠올랐다.

“소설을 통해 어머니에게 언어를 선물해 드렸다.”

그 말이 가슴에 오래 남았다. 나도 그랬다. 누군가에게 그리고 나 자신에게 언어를 선물해주고 싶어 글을 쓰기 시작했다. 표현되지 않은 감정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 내 안의 슬픔과 상처가 언어 밖에서 버려지지 않도록, 나는 언어로 건져 올리고 싶었다.


글쓰기 밀월기에는 사전을 벗 삼아 살았다. 책을 읽으며 단어장을 만들었고, 새롭게 배운 단어에 열광했다. 이미 알고 있던 단어도 나만의 정의를 붙이려 애썼다. 국어사전을 소설책처럼 읽고, 단어 하나하나를 탐험하듯 들여다봤다. 언제부턴가 그 모든 노력을 멈췄다. 손에 쥔 종이사전은 포털 검색으로 대체됐고, 유의어 정리는 복붙으로 바뀌었다. 독자들이 이해하지 못할까 봐, 쉬운 표현만 골라 쓰기 시작했다. ‘쉬운 언어가 더 친절하다’는 핑계를 댔지만, 결국은 뻔하고 무딘 문장만이 남았다.


나는 이해받기 위해 언어를 버렸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렇게 버린 언어만큼, 내 세계도 축소되었다.

감정도, 감각도 그만큼 줄어들었다.


다시 사전을 펼친다. 귀가 아프다고만 말하던 내가, 이렇게 말해 본다.


"귀 안에 난로가 있는 것처럼 은근하지만 집요하게 달아오른다. 건드리지 않아도 화끈거리고, 그 열기는 피부가 아니라 뼈와 고막 사이 어딘가에서 천천히 퍼져나온다. 귓속에 작은 풍선 하나가 빵빵히 부풀어 있다. 곧 터질 듯한 압박감이 느껴진다. 한편으론, 귓속 어딘가에 벌레 한 마리가 기어다니는 듯 간지럽고 아릿하다. 손가락으로 긁고 싶지만, 닿지 않는 거리에서만 꿈틀거린다."


표현할 수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표현하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귀찮다는 핑계로, 언어를 포기했던 것이다.


작가는 언어로 세계를 정밀하게 조직하는 사람이다.

그 조직을 멈추는 순간, 더 이상 작가가 아니다.


나와 타인에게, 보다 뾰족하고 정확한 언어를 선물하는 일.

그 일의 보람을 잊고 있었다.


100일 챌린지 나흘째.

나는 언어를 되찾고 싶다는 갈망을 발견했다.

그 갈망은 다시 내 세계의 크기를 넓힐 수 있을까.




WechatIMG9769.jpg 윤소희 작가


책 읽어주는 작가 윤소희


2017년 <세상의 중심보다 네 삶의 주인이길 원해>를 출간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24년 단편소설 '지금, 정상'으로 소설가 등단.

2006년부터 중국에 거주. ‘윤소희 작가와 함께 책 읽기’ '책과 함께' 등 독서 커뮤니티 운영.

전 Bain & Company 컨설턴트, 전 KBS 아나운서. Chicago Booth MBA, 서울대학교 심리학 학사.

저서로는 심리장편소설 <사이코드라마>와 <세상에 하나뿐인 북 매칭>

<산만한 그녀의 색깔 있는 독서> <여백을 채우는 사랑>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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