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일 챌린지_Day 3
어느새 잠에서 빠져나왔지만, 눈을 감고 어둠 속에 가만히 부유한다. 꿈은 멀어지고, 어둠은 깊어지며, 마음 어딘가엔 아직 끝나지 않은 문장이 떠다닌다. 갑작스레 몸을 일으키면 그것은 사라진다. 마치 부풀어 오른 풍선껌이 터지듯, 꿈의 조각들은 한순간에 사라질 수 있다.
띠리리—
익숙한 알람 소리에 심장이 툭 떨어진다. 매일 듣는 소리인데도, 놀라는 건 여전하다. 서둘러 손을 뻗어 알람을 끄고, 다시 침묵 속에 귀를 기울인다. 조금 아까까지 분명 생생했던 꿈이,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은 채 스러졌다. 마음이 허전하다. 잠결에 잡았던 그 무언가를 놓쳐버린 것 같아. 놓쳐버린 꿈은 꼭 멋진 문장의 소재가 될 수 있을 것만 같아 더욱 아쉽다.
새벽 4시. 삼십 대 후반부터 새벽 3시에 일어나 글을 쓰기 시작했다. 몸보다 마음이 먼저 깨어 있던 시절이었다. 오십이 된 이후, 알람은 한 시간 늦춰졌고, 몸이 먼저 눈을 뜨지만 서두르지 않는다. 몸의 시계에 맞춰 작은 변화를 받아들인다.
남편을 깨우지 않기 위해 살금살금 화장실로 간다. 볼일을 보고 인바디를 재며, 어제의 나를 훑는다. 근육량은 유지되었고, 체지방은 늘지 않았다. 안도의 숨을 내쉬고, 가글과 안약, 미지근한 물 한 잔, 유산균. 서재에 앉아 천천히 음양탕을 마시며 다이어리를 꺼낸다. 쓰는 손끝이 하루의 리듬을 조율해 간다. 3년 다이어리, 마음 챙김 읽기, 5년 후 나에게 - Q&A. 어제의 마음이 오늘의 나를 부른다.
간밤의 꿈이 기억났다면 꿈 일기도 썼을 텐데, 오늘은 불발이다. 최근엔 챗GPT에게 꿈 해석을 부탁해 보며, 무의식의 흔적들을 엮어보는 중이다. 오십이 넘도록 낯선 나를 이해해 보려는 작은 시도다. 이 기록들은, 쓰는 것이 아니라 나를 읽는 일이다.
필사를 한 페이지 한다. 내 두 번째 책 『여백을 채우는 사랑』을 준비하던 시절, 편집장이 권했던 습관이다. 그때부터 아름다운 문장들을 수집하듯 필사해 왔다. 손가락이 쉽게 아파 타자를 이용했지만, 요즘엔 여백이 마련된 필사책 덕에 손으로도 써본다. 오늘은 『나의 라임오렌지나무』에서 발췌한 문장들. “사랑하기를 그만두는 것이 진정 죽이는 것이다.” 마음속에도 노폐물이 쌓인다. 감사를 놓치면, 그 찌꺼기가 미움이 된다. 손끝으로 문장을 따라 쓰며, 마음을 씻어낸다.
창밖에서 새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아직은 어둡다. 찬양을 낮게 틀고, 묵상집을 펼친다. 요즘은 요한계시록을 묵상 중이다. 쉽지 않은 구절들 사이에서 오늘의 메시지를 다섯 문장으로 추려낸다. 가족과 나눌 말씀, 아이들과 함께 읽을 통독 본문, 맥체인 성경 읽기 유튜브 링크까지 정리해 둔다. 기도는 잘 되지 않는다. 머릿속이 너무 시끄럽다. 그래서 찬양에 의지한다. 찬양의 가사에 내 기도를 기대어 본다.
밝아온 창밖, 독서대 위엔 어제 읽던 소설이 펼쳐져 있다. 한 문장이 마음을 붙든다. “사람 마음처럼 손쉬운 게 또 있을라고…” 손쉬운 줄 알았는데, 어째서 내 마음은 이토록 무겁고, 글 한 줄 쓰기도 어려운가. 이 고요한 새벽은 오롯이 나의 시간인데, 나는 여전히 ‘내 글’을 쓰지 못한다. 남의 글을 읽고 베껴 쓰며 하루를 연명하지만, 정작 내 안에서 길어 올려야 할 이야기는 침묵한다. 어쩌면 나는 아직, 그 이야기를 찾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특별할 것 없는 날들의 세부사항들이, 나를 회복시켜 줄 수 있을까. 글을 쓰지 못한 날에도, 써야겠다고 마음먹은 그 사실 하나로 나는 다시 '쓰는 인간'이 될 수 있을까. 100일 챌린지. 그저 또 하루를 견뎠다는 증거가 아니라, 잊힌 나를 불러내는 기도처럼, 이 새벽의 몸부림을 남겨두기로 한다.
책 읽어주는 작가 윤소희
2017년 <세상의 중심보다 네 삶의 주인이길 원해>를 출간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24년 단편소설 '지금, 정상'으로 소설가 등단.
2006년부터 중국에 거주. ‘윤소희 작가와 함께 책 읽기’ 등 독서 커뮤니티 운영.
전 Bain & Company 컨설턴트, 전 KBS 아나운서. Chicago Booth MBA, 서울대학교 심리학 학사.
저서로는 심리장편소설 <사이코드라마>와 <세상에 하나뿐인 북 매칭>
<산만한 그녀의 색깔 있는 독서> <여백을 채우는 사랑>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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