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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꺼이 불편을 감수하려는 고집- AI 시대 글감 채집법

100일 챌린지 Day 2

by 윤소희
매일 어떻게 글을 써요? 그렇게 쓸 이야기가 많나요?


지난여름, KBS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했을 때, 아나운서가 던졌던 질문이다.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이 질문이 얼마나 엉뚱한지 안다. 쓰지 않는 사람에겐 세상이 침묵으로 가득하지만, 쓰는 이에게 세상은 끊임없는 이야기의 샘이다. 글을 쓰면 쓸수록 그 샘은 깊어진다.


단, 멈추지 않아야 한다. 시동을 껐다 다시 거는 데는 생각보다 많은 에너지가 든다. 한번 멈추면, 마음속 글감 창고도 비워진다. 창밖 풍경도, 책 속 인물도, 사람의 말도 허투루 지나가 버린다. 샘을 되살리는 길은 단순하다. 다시 쓰는 것이다. 결국 100일 챌린지를 질러버린 이유다.


글쓰기 수업을 할 때 가장 중요한 일 중 하나는 글을 쓰고자 하는 이들에게 매일의 글감을 주는 것이었다. 무슨 질문을 던지느냐에 따라, 어떤 글이 태어날지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매일 글을 쓰기 위해 365일 날짜별로 글감을 제공하는 책도 자주 이용했다. 지금은 다른 이에게 나눔 하고 없지만, 날짜별로 적어둔 글감 목록은 남아 있다. 예를 들어 8월 2일의 글감은 '이런 대가를 치렀다'이다. 쓸거리를 일상에서 찾지 못한 날은 그렇게 책에서 불러주는 씨앗 하나로 문장을 만들기도 했다.


물론 요즘은 이런 책도 필요 없다. 챗GPT에게 글감을 달라고 요구하면, 100개, 1,000개쯤 금세 쏟아진다. 솔직히, 나는 그게 싫다. 최근 나의 글쓰기 무기력을 심화시킨 주범 중 하나가 바로 AI였다. 내가 오래도록 고민해서 할 일을 뚝딱 해치우는 AI 앞에서 긍지와 기쁨을 느끼며 나의 일을 계속할 수 있을까. 언젠가는 결국 거의 모든 것을 AI에게 넘기게 될 날이 오겠지만, 아직은 그러고 싶지 않다.


이 더운 여름날, 귀찮음을 무릅쓰고 집 밖으로 나섰다. 집 앞에 있는 작은 공원을 걷는다. 글감을 채집하기 위해, 직접 몸을 움직인다. 더디고 귀찮지만 아직은, 이런 원시적인 방법이 좋다. 이틀 전에는 장갑을 낀 채 네 발로 기어가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베어 크롤’이라 불리는 운동을 하는 사람들. 오늘은 그 자리에 또 다른 풍경이 눈에 띄었다. 머리를 짧게 깎고 반바지만 입은 채 나란히 뛰는 부자(父子)의 뒷모습. 아빠의 등에는 커다란 날개로 보이는 문신이 새겨져 있고, 열 살쯤 되어 보이는 아들은 금박이 박힌 흰색 복싱 팬츠를 입고 있다. 아빠는 아들에게 괜찮냐고 묻고, 아들은 씩씩하게 답을 하며 아빠와 나란히 달린다. 두 사람 모두 비상을 꿈꾸고 있는 듯 가벼워 보였다.


IMG_4633.jpeg 반바지만 입은 채 나란히 뛰는 부자(父子)의 뒷모습


나는 그 장면을 마음속에 저장해 둔다. 언제든 새로운 캐릭터가 필요할 때, Ai는 금세 누군가를 생성해 줄 것이다. 배경도, 갈등도, 복선도, 마치 도깨비방망이처럼 뚝딱 만들어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탄생한 이야기가 아무리 재미있고 잘 팔린다고 해도, 작가가 글을 쓰는 과정에서 누릴 수 있는 긍지와 행복은 사라질 것이다.


걷고, 보고, 기억한다. 아직은 그렇게 쓰고 싶다. 숨을 헐떡이며 더운 공원을 달리는 일이 고역일지라도, 그 고됨 속에 숨은 기쁨이 있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작품이 완성되고, 좋은 반응을 얻는 것도 좋지만, 더 귀한 건 씨앗을 품고 오래 고민하는 시간이다. 헤매고 방황하는 시간, 발품을 팔아 디테일을 수집하는 시간. 그 과정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상상만으로도 마음이 헛헛해진다.


결과 따위는 잊기로 했다. 좋은 글이 써지든 말든, 이 과정을 살아내는 것. 그것이야말로 내가 작가로 남는 유일한 길이다. 대충이지만, 매일 쓰기로 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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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어주는 작가 윤소희


2017년 <세상의 중심보다 네 삶의 주인이길 원해>를 출간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24년 단편소설 '지금, 정상'으로 소설가 등단.

2006년부터 중국에 거주. ‘윤소희 작가와 함께 책 읽기’ 등 독서 커뮤니티 운영.

전 Bain & Company 컨설턴트, 전 KBS 아나운서. Chicago Booth MBA, 서울대학교 심리학 학사.

저서로는 심리장편소설 <사이코드라마>와 <세상에 하나뿐인 북 매칭>

<산만한 그녀의 색깔 있는 독서> <여백을 채우는 사랑>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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