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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글쓰기는 결국 이별의 기술

100일 챌린지_Day 69

by 윤소희

손글씨로 남긴 메모에는 묘한 생생함이 있다. 하지만 나 같은 악필은 내가 쓴 글씨를 해독하지 못한다는 문제가 있다. 그래서 웬만해서는 손글씨로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디지털 메모 앱은 그런 내게 구세주였다. 버튼 하나로 동기화된 기록을 노트북에서 이어 쓸 수 있을 때, 새로운 세계를 맛보았다. 그중 '에버노트'는 내 글쓰기의 숨은 동반자로, 글의 양이 폭발적으로 늘어난 것도 그 덕분이었다.


하지만 에버노트 중국판인 ‘인샹비지(印象笔记)’와 국제판은 서로 다른 길을 걷고 있었고, 나는 두 세계 사이에서 자주 오류를 마주해야 했다. 국제판과 중국판 사이의 노트 공유가 불가능했고, 국제판 계정으로는 중국 사이트에 접속할 수도 없었다. 실종되는 기록이 늘어나자, 결국 10 년 넘게 의지하던 앱을 떠나야 했다.


대체지를 찾던 끝에 노션을 만났다. 마치 이사를 독려하듯, 에버노트에서 모든 노트를 한꺼번에 옮겨오는 기능이 있었다. 나는 며칠을 꼬박 들여 수만 개의 노트를 포장이사하듯 옮겼다. 그렇게, 오랜 친구 같은 앱과 작별했다.


문제를 발견한 건 짐을 풀고 나서였다. 많은 노트들이 텅 비어 있었다. 제목만 남고 내용은 사라지기도 했고, 사진과 동영상은 '열 수 없음'이라는 냉정한 오류 알림만 남겼다. 내가 애써 기록했던 문장, 다시는 떠오르지 않을 사유의 조각들이 한순간에 증발했다. 그때의 허무는 오래된 일기장을 펼쳤는데, 글씨들이 대부분 지워진 사실을 마주한 기분이었다.


상실감은 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이상하게도 담담해졌다. 돌이켜 보니, 수만 개의 기록 중에서 내가 평생 다시 열어볼 것은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기억 속에서 흩어진 것들을 애써 붙잡을 필요는 없었다. 남아 있는 기록만으로도 충분했다.


기록이란 애초에 완벽히 보존되지 않는다. 아무리 공들여 쌓아도, 어떤 것은 새어나가고 흩어진다. 마음속의 모든 생각을 문장으로 옮기려 하지만, 다 담을 수는 없다. 글 역시 언제나 불완전하다. 오히려 그 불완전성 덕분에 살아 있다. 빈틈에서 사유가 숨 쉬고, 사라진 자리에서 새로운 상상이 움트기 때문이다.


나는 이사할 때마다 많은 물건을 정리한다. 버리는 걸 싫어하는 남편 몰래, 자질구레한 것들을 치운다. 모든 것을 다 들고 이사한다면 집은 곧 창고가 되고, 삶은 무거워질 것이다. 글도 같다. 순간에는 아까워 보이는 문장도 결국 덜어낼 때, 비로소 제 자리를 찾는다. 편집과 삭제는 파괴가 아니라 살리는 일이다.


우리는 글을 남기기 위해 쓰지만, 동시에 잊기 위해서도 쓴다. 흐르고 증발하는 문장이 있기에, 끝내 붙잡혀 오래 남는 문장이 있다. 모든 글이 돌처럼 영원하다면 우리는 숨 막힐 것이다. 사라짐을 허락해야만, 진짜 소중한 것이 반짝인다.


어쩌면 모든 기록은 사라지기 위해 기록되는 것인지 모른다. 글쓰기는 이 역설 속에서, 나만의 언어를 길어 올리는 일이다.



Weixin Image_20250830172552_207.jpg 윤소희 작가


책 읽어 주는 작가 윤소희


2017년 <세상의 중심보다 네 삶의 주인이길 원해>를 출간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24년 단편소설 '지금, 정상'으로 소설가 등단.

2006년부터 중국에 거주. ‘윤소희 작가와 함께 책 읽기’ 등 독서 커뮤니티 운영.

전 Bain & Company 컨설턴트, 전 KBS 아나운서. Chicago Booth MBA, 서울대학교 심리학 학사.

저서로는 심리장편소설 <사이코드라마>와 <세상에 하나뿐인 북 매칭>

<산만한 그녀의 색깔 있는 독서> <여백을 채우는 사랑>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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