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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크색은 힘을 빼앗는다 - 아름다움이 의지를 삼킨 날

100일 챌린지_Day 85

by 윤소희

말하지 말라.

덧붙이지 말라.

이미지가 스스로 말하게 두라.

그 문장들을 읽는 순간, 내 안에서 무언가 바스러지는 소리가 났다.


나는 사진을 잘 찍는 사람이 되고 싶은 게 아니었다. 글을 쓰기 위한 씨앗들을 프레임에 담아 수집하고 싶었다. 함께 빛을 담아 보기로 결심한 건, 마음의 가장 깊은 부분을 열어젖히는 일이었다. 하지만 누군가 그 문을 닫으라 한다면, 나는 어디에 내 안의 말을 걸 수 있을까.


하지 말라고 하면 오히려 하고 싶어진다. 금지는 언제나 욕망의 불씨를 키운다. 표현은 내 생존 방식이다. 말하지 않으면, 나는 사라져 버릴지 모른다. 글은 내가 살아 있다는 증거이고, 사진은 그 증거의 그림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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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크는 힘을 흡수하는 색이다. 부드러움으로 폭력을 삼키는 색


해가 얼굴을 내밀고 감출 때마다 피부에 닿는 온도가 오르락내리락했다. 분홍빛 들판 앞에 섰을 때, 바람에 흔들리는 핑크뮬리의 물결 속에서 수천 개의 마음이 동시에 떨리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에겐 사랑의 상징인 그 빛깔이 내게는 묘한 우울의 신호가 되었다. 교도소의 벽을 핑크색으로 칠하자 폭력 사건이 줄었다는 실험을 읽은 적이 있다. 핑크는 힘을 흡수하는 색이다. 부드러움으로 폭력을 삼키는 색. 아름다운 핑크뮬리가 내 안의 의지를, 슬럼프와 함께 천천히 잠식해 갔다. 사진으로 매너리즘을 벗어나고 싶었지만, 오히려 ‘할 수 없음’이라는 감정에 침몰했다.


IMG_6027.jpg 이미지는 풍경이 아니라, 부서진 감정의 잔향이다


아무리 비싼 카메라와 훌륭한 기술을 갖춰도 현장에서 본 핑크뮬리의 숨결을 그대로 담을 수는 없다. 완벽히 사랑할 수 없기에, 프레임으로, 문장으로 기록한다. 프레임에 보이는 건 분홍빛 들판이지만, 그건 사라져 버린 내 마음의 일부다. 이미지는 풍경이 아니라, 부서진 감정의 잔향이다.


목화솜이나 깃털에도 상처받을 수 있는 마음으로 살아간다는 건 세상과 부딪힐 때마다 조금씩 닳아가는 일이다. 하지만 상처받지 않으려 애쓸수록 표현은 메말라간다. 감각의 피부를 두껍게 하는 대신, 자주 찢어지는 채로 남겨 두기로 했다. 빛이 통과할 수 있도록. 내 안의 문장이 숨을 쉴 수 있도록.


(*폭력적인 누군가에게는 핑크 색 속옷을 입히시길)



IMG_6003.JPG 윤소희 작가

책 읽어 주는 작가 윤소희

2017년 <세상의 중심보다 네 삶의 주인이길 원해>를 출간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24년 단편소설 '지금, 정상'으로 소설가 등단.

2006년부터 중국에 거주. ‘윤소희 작가와 함께 책 읽기’ 등 독서 커뮤니티 운영.

전 Bain & Company 컨설턴트, 전 KBS 아나운서. Chicago Booth MBA, 서울대학교 심리학 학사.

저서로는 심리장편소설 <사이코드라마>와 <세상에 하나뿐인 북 매칭>

<산만한 그녀의 색깔 있는 독서> <여백을 채우는 사랑>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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