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일 챌린지_Day 85
말하지 말라.
덧붙이지 말라.
이미지가 스스로 말하게 두라.
그 문장들을 읽는 순간, 내 안에서 무언가 바스러지는 소리가 났다.
나는 사진을 잘 찍는 사람이 되고 싶은 게 아니었다. 글을 쓰기 위한 씨앗들을 프레임에 담아 수집하고 싶었다. 함께 빛을 담아 보기로 결심한 건, 마음의 가장 깊은 부분을 열어젖히는 일이었다. 하지만 누군가 그 문을 닫으라 한다면, 나는 어디에 내 안의 말을 걸 수 있을까.
하지 말라고 하면 오히려 하고 싶어진다. 금지는 언제나 욕망의 불씨를 키운다. 표현은 내 생존 방식이다. 말하지 않으면, 나는 사라져 버릴지 모른다. 글은 내가 살아 있다는 증거이고, 사진은 그 증거의 그림자다.
해가 얼굴을 내밀고 감출 때마다 피부에 닿는 온도가 오르락내리락했다. 분홍빛 들판 앞에 섰을 때, 바람에 흔들리는 핑크뮬리의 물결 속에서 수천 개의 마음이 동시에 떨리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에겐 사랑의 상징인 그 빛깔이 내게는 묘한 우울의 신호가 되었다. 교도소의 벽을 핑크색으로 칠하자 폭력 사건이 줄었다는 실험을 읽은 적이 있다. 핑크는 힘을 흡수하는 색이다. 부드러움으로 폭력을 삼키는 색. 아름다운 핑크뮬리가 내 안의 의지를, 슬럼프와 함께 천천히 잠식해 갔다. 사진으로 매너리즘을 벗어나고 싶었지만, 오히려 ‘할 수 없음’이라는 감정에 침몰했다.
아무리 비싼 카메라와 훌륭한 기술을 갖춰도 현장에서 본 핑크뮬리의 숨결을 그대로 담을 수는 없다. 완벽히 사랑할 수 없기에, 프레임으로, 문장으로 기록한다. 프레임에 보이는 건 분홍빛 들판이지만, 그건 사라져 버린 내 마음의 일부다. 이미지는 풍경이 아니라, 부서진 감정의 잔향이다.
목화솜이나 깃털에도 상처받을 수 있는 마음으로 살아간다는 건 세상과 부딪힐 때마다 조금씩 닳아가는 일이다. 하지만 상처받지 않으려 애쓸수록 표현은 메말라간다. 감각의 피부를 두껍게 하는 대신, 자주 찢어지는 채로 남겨 두기로 했다. 빛이 통과할 수 있도록. 내 안의 문장이 숨을 쉴 수 있도록.
(*폭력적인 누군가에게는 핑크 색 속옷을 입히시길)
책 읽어 주는 작가 윤소희
2017년 <세상의 중심보다 네 삶의 주인이길 원해>를 출간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24년 단편소설 '지금, 정상'으로 소설가 등단.
2006년부터 중국에 거주. ‘윤소희 작가와 함께 책 읽기’ 등 독서 커뮤니티 운영.
전 Bain & Company 컨설턴트, 전 KBS 아나운서. Chicago Booth MBA, 서울대학교 심리학 학사.
저서로는 심리장편소설 <사이코드라마>와 <세상에 하나뿐인 북 매칭>
<산만한 그녀의 색깔 있는 독서> <여백을 채우는 사랑>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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