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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소희 Apr 14. 2020

벼랑 끝에 서서 바람에게

그 어떤 상황에서도 삶은 계속된다

2주 정도면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집 떠난 지 벌써 두 달이 되었다. 방 다섯 개에 창고까지 그득 채운 물건들이 없어도 우리는 잘 지내고 있다. 없어도 사는데 불편한 물건은 별로 없지만, 그리운 물건들은 있다. 오랜 시간 살을 맞대며 지내온 인형들과 기타, 베이스 같은 악기를 그리워한다.


아이들의 그리움 몹시 차오른 어느 날, 악기를 대여해 주는 합주실을 예약했다. 아이들은 내내 들떠 있었다. 바이러스 때문에 낯선 곳에 발을 들이는 일이 걱정되었지만, 부푼 꿈을 무자비하게 터뜨려 버릴 수 없어 대신 마스크와 손소독제, 소독 스프레이 등을 꼼꼼히 챙겼다. 드디어 합주실에 들어서니 아이들 얼굴이 상기된다. 낯선 악기를 마치 갓난아이처럼 조심스레 받아 안고 스트랩을 몸에 맞게 조절한다. 한 마디도 하지 않고 한 줄 한 줄 튜닝을 하는 아이들의 표정은 마치 전쟁터에 나가기 전 총을 손질하는 병사들처럼 비장하다.


합주실 예약을 해놓고 기다리는 몇 주간 우리에게는 악기도, 가르쳐줄 선생님도 없었다. 그저 곧 악기를 연주할 수 있게 된다는 기대감 하나로 그 순간을 기다리며 상상 속에서 연습을 했을 뿐. 악보 위의 음표들을 소리로 바꾸기 위해서는 몸을 어떻게 움직여야 할까, 끊임없이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하면서.  



마침내 튜닝을 마치고 더듬더듬 연주를 시작했다. 아이들과 내가 세대를 넘어 함께 좋아하는 Bon Jovi의 곡을. 서툴고 거친 연주지만 그럭저럭 세 악기 소리가 어우러져 하나의 음악이 된다. 악기가 질러대는 소리는 음악이자 두 달간 좁은 공간에 갇혀 있던 이들이 탈출해 외치는 외침이기도 했다. 악보 위에 죽어있던 음표들이 우리의 몸을 통해 음악이 되어 울려 나온다. 그 울림이 온몸으로 전해져 떨리기 시작한다. 굳어진 몸을 움직여 악기를 연주하는 내내 자꾸 웃음이 났다. '벼랑 끝에 서서 바람에게 나는 법을 가르치(Standing on the ledge I'll show the wind how to fly)는 우리만의 방식이 몹시 마음에 들어서. 제대로 날아본 적 없는 새끼 독수리들과 깃털이 다 빠진 늙은 독수리가 함께 벼랑 끝에서 힘차게 뛰어내리는 모습이 떠오른다. 우아함이나 매끄러움과는 거리가 먼 그들의 비상이 눈부시다.


하늘에서 바라본 세상은 화음으로 어우러지지 못하고 여전히 소란하다. 불안과 두려움을 조장하는 뉴스가 쏟아지고, 끊임없이 누군가의 잘못이라고 비난하는 분노의 목소리가 들린다. 하지만 그 어떤 상황에서도 삶은 계속된다. 편안하고 익숙하지 않은 방식일 지라도. 벼랑 끝에서 서툴게 날아오른 밴드가 세상을 향해 외쳐 본다.


"Have a Nice Day*!” 


(*합주실에서 아이들과 함께 연주한 Bon Jovi의 곡 제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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