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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소희 Jul 09. 2020

내가 그리워한 건 그녀의 '깡' 그리고 이야기

정읍 내장산을 걸으며

정읍에 왔는데 차가 없어 발이 묶이나 하고 있었는데, 정읍에 사는 지인이 버스 타고 정읍 시내 나오는 법을 알려주었다. 

‘북경문화길걷기’ 대장님 답게 그녀는 우리를 오늘 하루 '걷기의 세계'로 인도했다. 


그녀를 처음 만난 건 재작년 가을쯤이다. 걷는 일이나 운동에는 영 관심이 없던 내가 그녀의 말에 이끌려 ‘북경문화길걷기’를 찾았다. 그녀는 매주 수요일 오전에 사람들을 인솔해 북경과 인근에 있는 명소의 다양한 길들을 걸었다. 작년에 갑자기 한국에 들어가게 될 때까지 그녀는 8년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사람들과 함께 걸었다. 그녀가 떠나자 걷는 것도 시들해져, 걷기를 그만두었다.  


2018년 그녀를 만나 걸었던 중화민족원 (좌) / 수장성 (우)


그랬던 내가 뜻밖에 북경이 아닌 정읍에서 그녀와 함께 다시 걷는다. 정읍 시내에서 가까운 내장산을 찾았다. 탐방안내소를 출발해 내장사 - 원적암 - 사랑의 다리 - 벽련암 - 일주문을 거치는 ‘원적골자연관찰로 코스’, 약 4킬로미터를 걸었다. 그녀가 갑자기 한국으로 들어가는 바람에 북경에서 많은 길을 걷지는 못했지만, 그녀와 함께 걸었던 몇 번의 길들이 추억으로 떠올랐다. 걷는 내내 그녀가 살아온 이야기를 듣는 것이 좋았다. 사실 북경에서 걸을 때도 그녀의 이야기 듣는 것이 좋아 늘 그녀 옆에서 걸으려고 발걸음을 재촉하곤 했다. 


단풍 든 내장산이 유명하지만 여름 내장산도 아름답다


러시아어를 전공한 그녀가 당시 소련이던 그곳에 겁도 없이 들어가 살던 이야기, 구 소련이 무너지는 역사적인 순간을 함께 했던 이야기, 출판사에서 일할 때 지금은 거물이 된 작가들이나 정치인과 함께 일하던 이야기, 자신을 괴롭히던 편집국장을 퇴사시킨 이야기, 어린 시절 살던 동네를 찾아가 기억을 더듬어 살던 집터를 기어이 찾아낸 이야기, 중국의 여러 보이차 차밭을 돌며 어떻게 좋은 차를 고를 수 있었는지에 대한 이야기 등. 그녀의 이야기 소재는 무궁무진했다. 그녀를 그리워했던 건 끊임없이 이어지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그리워한 것이고, 또한 척박한 삶에서 아름다움을 찾아가는 그녀의 용기, 소위 ‘깡’을 그리워한 것이리라. 


오랜만의 산행이라 쉽지 않았지만, 그녀가 함께 하니 의지가 되어 두 시간이 금세 지나갔다. ‘북경문화길걷기’ 대신 ‘정읍문화길걷기’를 마치자 다시 헤어질 시간, 아쉽다. 


'대장님'과 함께 내장산에서


정읍의 유명한 쌍화차 거리에서 그녀가 대접해 주는 쌍화차를 마시며 헤어지는 시간을 조금 더 미뤄 본다. 쌍화차는 ‘한 잔’이 아니라 ‘한 끼’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마시고 나면 속이 든든하다. 그리 많지 않은 만남으로도 그녀가 내 속 깊이 들어와 꽉 채워주고 있는 것처럼. 


밤, 잣, 은행 등 견과류와 약재 등 수십 가지 재료가 들어가는 정읍 쌍화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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