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무릎 꿇다: 보고 싶은 이를 보고 싶은 밤

매디슨 카페 (Madison Cafe)

by 윤소희

14 무릎 꿇다: 보고 싶은 이를 보고 싶은 밤

@메디슨 카페 (Madison Cafe)



나는 말이며 사랑이니 2


- 김지후*



-마리아에게 -

오래 잠들지 못하였다.

어느 날 홀연히

당신의 음성이 내 귀에 닿았고

한 존재의 빛과 그늘을 보게 된 뒤로

매일 밤이 사투였다. 가시덤불 맨발이었다.

그대를 떠올릴 때마다

내 사랑의 우물이 메마르고 허약하여

오로지 감각할 수 있는 맹세와 고백을

그리도 애타게 갈망하였다.

세상 안 헛된 말들의 신기루

거듭된 채찍질에 온몸이 무너졌어도

다시 지상의 문법으로

걸고자 하였구나.

강 건너 당신을 생각할 때

새벽부터 한밤까지

오래된 내 육체는

터질 것 같은 욕망으로 직립하고

가장 차가운 얼음을 들이부어도

몸이 달아 꺼지지 않았다.

만지고 들을 수 있는 모든 것으로

그대를 남김없이 일으켜 세우고

닫힌 방마다 휘황한 불을 켜고 싶었다.

육체의 가장 깊은 곳에 혀를 대고

오랜 허기를 채우고 밀어 넣어

당신 시간의 모든 것과

일치하고 싶은 것이나

그토록 거칠게 낮과 밤을 달려

확인할 수 있는 것으로만

오래 말을 이어가고 싶은 것이나

그러나 이르노니

그것은 나의 ‘말’이 아니다.

시대를 거슬러 홀연히 남을

단 한 줄의 문장조차

아스라이 사라질 육체의 것이어서

저리도 간절하게 감각할 수 있는

지상의 옷을 입고자 하는 것이나

당신과 내가 만나야 할 문장은, 사랑은

참으로 세상 바깥의 것이로구나.

수위를 정해두고 넘치는 파도가 있는가

안온의 저녁으로만 부는 바람이 있던가

넘치지 않는 것은 파도가 아니고

바람의 운명을 거역하여 이미 바람일 수는 없는 것이나

북으로 돌아선 남쪽, 아래인 위, 차가운 폭발, 얼음의 혁명처럼

불가능의 가능을 이루려 함이니

그대와 나의 마주침이 이토록 무겁고 아프구나.

당신의 멈추지 않는 기도는

가닿을 수 없는 기슭을 꿈꾸며

오로지 상상의 힘으로

말의 집 안에서만 소용되는 육체를 얻고자 함이니

내 영혼을 태워 완전하게 사라지는 적멸을 소망하는 것처럼

빛을 향해 걸어온 그 오랜 갈구와 닮았다.

그대는

그대를 ‘신앙’하라는 것이니

그대가 내게 주는 소명이 그처럼 높고 넘치는구나.

먼 길을 돌아온 당신이여,

이 복종이, 자청한 굴욕이

내 존재를 온전하게 그대 안에 놓아 해방되는 초월의 꿈이라 하니

우리는

제때에 온 것이다.

너와 나의 길에서

그토록 참혹하게 무너져 오지 않았다면

빈 들의 모습으로 마주쳐

서로 무릎 꿇어 기대지 않았다면

예전의 사랑들과 같은 모습으로

범속하게 왔을 것이니

때로는 거친 비바람으로 그대를 몰아세우거나

세상 밖으로 도망치자고 속삭였을 것이니

이는 내가 진정으로 네게 바라는 바가 아니라.

모든 언약이 무너져 내린 들판에서

이렇게 마주침으로

시작하여 끝나고

우린 “다 이루었다.”

나인 너여.

마침내 마주친 내 안의 또 다른 나여. 불꽃이여.

내 소망과 믿음, 사랑

그 참혹한 현신인 당신에게

가장 낮은 자세로 엎드린다.

나의 마리아여.


(*김지후 - 소설 속에서 이솔과 문장으로 사랑을 나누는 캐릭터.)



밤을 거의 뜬 눈으로 새우고, 아침 일찍 헝산루(衡山路)로 향했다. 이른 아침에 헝산루라니. 이 지역은 밤이 화려하고 북적대는 곳이 아니던가? 지후가 알려준 대로 길을 따라가다 보니 작은 쪽문이 열려 있다. 정말 아침 7시에 문을 여는 카페다. 작은 쪽문으로 들어가자 왼쪽 벽면 가득 카페 그림이 그려져 있고, 그림 속 간판에 'Madison Cafe'라고 쓰여 있다.


매디슨.JPG 매디슨 카페 (Madison Cafe)


상하이로 이사온지 벌써 1년 반, 이 거리를 최소한 수십 번은 걸었을 텐데도 보지 못했다. 아니 보지 않았다. 보고 싶지 않았고, 관심 없었다. 그저 한국을 떠나고 싶었을 뿐이니까. 그래서 발견하지 못했던 곳, 그가 이 작은 마법의 쪽문을 열어준 것이다.


"그는 내가 느끼는 것, 내가 원하는 것을 모두 내게 주었다.
그 순간 내가 그랬으면 하고 원하는 방식으로 나를 지배하여 신비스러운 절정에 다다랐다.
난 다른 여자가 된 듯했다. 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나 자신다웠다."

영화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 '프란체스카'의 대사 중


'나답다'는 건 무엇일까?

누군가의 아내로, 엄마로, 그 가면 뒤에 숨어 살고 있는 내게.


매디슨1.png 영화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


기억에 아무런 아름다운 흔적을 남기지 못했던 영화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 사랑한다면 따라서 떠나면 되지, 왜 남은 생을 구질구질하게 보내는가. 젊은 날의 나는 프란체스카의 마음 한 자락을 읽어낼 수 없었다. 떠나보낸 후 괴로울 줄 알면서도 떠나보낼 수밖에 없던, 그리고 떠나보낸 후 괴로워하던 프란체스카와 매디슨 카페에서 마주친다.


"당신은 이해 못해요. 누군가와 가정을 이루고 자식을 낳으며 살기로 결정한 순간 어떤 면에서는 사랑이 시작된다고 믿지만 사랑이 멈추는 순간이기도 해요."

영화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 '프란체스카'의 대사 중


이제는 이해할 수 있다고, 아니 내가 당신이라고 갑자기 소리라도 꽥 지르고 싶어 졌다.

아니야, 이해하고 싶지 않아, 난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아.

아니야, 그래도 그럴 수 없어.


수 없이 많은 밤을 보냈다. 보고 싶은 이를 보고 싶은 밤들을. 보고 싶은 이를 보기 위한 단 한 가지 방법이 늘 먼저 머리에 떠올랐다. 하지만 그것만은 내게 허락되지 않았기에, 그 방법을 떠올릴 때마다 가슴에 바늘 하나를 꾸욱 눌러 꽂았다.


내가 이 자리에 확고히 서 있지 않는다면,

보고 싶은 이를 보고 싶은 이 밤

보고 싶은 그가 내 곁에 불려 온다 해도 어쩔 수 있을까 싶어.

밤마다 보고 싶은 이를 보기 위한 단 한 가지 방법을 제외한 다른 방법을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새까맣게 타 버린 내 가슴처럼, 이 몸뚱이마저 다 타 가루가 되면 바람결에 날아다닐 수 있겠지. 부디 내 뼛가루만은 놓아 달라고 부탁하리라. 내 뼛가루만은 작은 단지 안에 담아 차고 답답한 묘지 안에 가두지 말아 달라고.


보고 싶은 이를 보고 싶은 밤,

뼛가루만은 자유롭게 날아가 볼 수 있도록.




헝산루(衡山路)


상하이에는 과거 열강들의 조계지들이 남아 있다. 이 조계지들은 모두 아편전쟁 후 맺은 난징조약(南京缔约)으로 인해 외국인이 통치하며 거주한 지역을 말한다. 그중에서도 프랑스 조계지는 상하이 속의 작은 유럽으로 많은 사람들이, 특히 외국인들이 즐겨 찾는다. 프랑스 조계지 내에서도 대표적인 곳이 헝산루로 플라타너스가 늘어선 아기자기한 골목에는 이국적이고 세련된 인테리어의 상점이나 카페, 레스토랑, 바들이 즐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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