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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소희 Jan 28. 2021

혹독한 출간 여정: <여백을 채우는 사랑> 3

소설을 쓰고 싶었는데 시인이 되라니

https://brunch.co.kr/@yoonsohee0316/545

시를 많이 읽으세요. 아니 당분간 시만 읽으세요.


제게 너무도 혹독한 주문이었어요. 읽기 중독이거든요. 특히 서사가 있는 글을 좋아해서 소설을 안 읽고는 살 수가 없는데, 시만 읽으라니.


시집이 한 번에 일고여덟 권씩 배달되기 시작했어요. 사실 시집을 일고여덟 권 쌓아 놓아 봤자, 두툼한 소설책 한두 권 분량이에요. 몇 권짜리 소설책은 순식간에 뚝딱 읽어내면서 시집은 왜 이리 읽기 어려울까요. 사실 시만 읽으라는 편집자의 말도 지키지 않았어요. 몰래몰래 다른 책을 훨씬 더 많이 읽었어요. 어쩐지 시만은 친해지기 어려워, 어떤 날은 시집을 읽다 머리가 터져버릴 것 같았어요. 어쩌면 그렇게 쓸 수 있어야 한다는 강박이 머리를 짓누르고 있었기 때문일 거예요.


편집자가 요구하는 건 많아도, 단 한 번도 서두른 적이 없어요. 오래 걸려도 좋으니 좋은 글을 쓰는 데만 초점을 맞추라는 거죠. 늘 조급한 건 내 쪽이었어요. 더디게 할수록 내 책이 출간되는 날짜가 점점 미뤄지는 거잖아요. 처음부터 이길 수 없는 게임이에요. 시간이 내 편이 아니니까요. 


결국 항복하고 시를 읽기 시작했어요. 편집자의 조언대로 시집 뒤에 나오는 해설을 먼저 읽고 그 후에 시를 읽었어요. 매일 하는 필사도 시만 필사했고요. 책상이나 식탁, 침대 등 제가 지나가는 곳에는 시집을 한두 권씩 놓아 아침부터 저녁까지 언제든 시를 읽을 수 있게 해 뒀어요.


사색을 많이 하세요. 사유의 깊이가 더 있어야 해요. 서정적인 것도 더 끌어내야 하고. 시를 많이 읽으세요.


그의 말이 옳았어요. 더 밀고 들어갈 수 있을 텐데, 그쯤에서 발을 빼버리고 마는 문장들. 쓰윽 겉만 핥고 변죽만 울리다 마는 글들. 진짜 쓰고자 하는 이야기를 쓰지 못하고 머뭇대는 저를 빤히 들여다보고 있었던 거죠.


편집자 앞에서 울지 않고 에세이 한 편을 완성했던 날. (정확히 말하면 에세이 한 편이 완성되는 걸 지켜보던 날) A4 두 장 반을 쓴 글이 편집자의 손에 의해 반장으로 압축되면서 밀도 있는 글이 되는 것을 눈으로 똑똑히 확인했어요.

 

이제 이렇게만 쓰시면 돼요.


아직도 내게는 너무도 먼 일이지만, 최소한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는 말인 거죠? 마치 무죄 판결처럼 들렸어요. 이제 감옥에서 나가 집에 돌아가도 된다는. 미팅을 마치고 저녁 늦게 집으로 돌아오자, 남편과 아이들 모두 내 기분을 살피는 게 보여요. 눈치 보는 가족들에게 살짝 미소 지으며 엄지를 치켜줬죠.
 


편집자는 두 달을 주며 자유롭게 90편을 써 오라고 주문했어요. 드디어 본격적으로 내 글을 쓰는 거예요. 그야말로 의기충천! 단숨에 좋은 글로 책 한 권 뽑아낼 수 있을 것 같았죠. 코로나 19는 여전했지만, 좋은 글을 위해 심지어 한 달 여행도 감행했어요.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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