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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소희 Mar 10. 2021

그녀의 얼굴에 똥칠을 했다 (2)

사랑은 찰나에 반대 방향으로 틀어버릴 수 있는 위험한 열정

https://brunch.co.kr/@yoonsohee0316/582


(이 매거진 내 모든 글은 '손바닥만 한 소설' 즉 콩트입니다. 실화가 아닌 허구입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웠다. 이불을 여러 겹 덮었는데도 떨리는 몸이 진정되지 않았다. 경란은 이불속에서 자기 머리카락을 쥐어뜯기도 했는데, 실제로 머리카락이 몇 움큼 빠졌다. 


“진희야,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책상에 엎드려 울고 있는 진희에게 모른 척 다가가 들썩이는 어깨에 손을 얹는 경란의 손이 몹시 떨렸다. 경란은 얼른 다른 한 손으로 떨리는 손을 덮어 눌렀지만 그래도 그 떨림을 가라앉힐 수는 없었다. 하지만 아무도 경란의 그런 손떨림을 눈치 채지 못했다. 대답도 못하고, 고개를 들지도 못한 채 서럽게 울고 있는 진희에게 경란은 손수건을 건넸다. 


‘진희는 걸레.’


화장실 청소 검사를 하던 한 여선생에게 낙서가 발견되어 교무실에도 소문이 번졌다. 예쁘장한 얼굴과 이미 처녀티를 감출 수 없는 몸매로 남자 선생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하고 있는 진희였기에, 몇몇 여선생들은 자기들끼리 수군대면서 고소해하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수업 중에 진희의 몸으로 던지는 남자 선생들의 시선이 좀 더 은밀해지고 끈적해졌다. 미술 선생은 미술 시간마다 근거 없는 소문을 퍼뜨리고 화장실 벽에 낙서 같은 걸 하는 녀석은 걸리기만 하면 당장 퇴학시켜버리겠다고 분을 내며 소리 질렀다.  


상냥하고 활발한 이미지가 중요하다는 걸 경란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야 선생님들의 감시망에 걸리지 않을 수 있다. 진희에게 라이벌 의식을 갖고 있던 몇몇 아이들을 중심으로 ‘걸레’나 ‘창녀’란 말을 쓰며 진희에게 노골적으로 모욕을 주는 패거리가 생겨났다. 그런 아이들에게 진희가 욕을 들을 때마다 경란은 진희를 더 감싸고 위로하며 진희 편을 들었다. 경란은 착한 소녀의 허울을 쓰고, 자신의 열등감과 분노를 잘게 부수어 은밀하게 처리했다. 


경란은 나이가 들어버린 지금까지도 ‘아름다움’ 하면 파블로프의 개처럼 진희의 얼굴을 떠올린다.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동경이 커 갈수록 진희 곁에 바짝 붙어 진희의 모든 것을 흉내 냈다. 아름다움은, 손안에 쥐고 있으면 마치 제 것 같았고, 가까이 있으면 감기나 열병이 옮겨 오듯 제게로 스며들어줄 것만 같았다. 경란은 진희를 사랑했다. 사랑은 찰나에 반대 방향으로 틀어버릴 수 있는 위험한 열정이란 것을 경란은 그때 알지 못했다.


“진희야, 나 그림 좀 가르쳐 주면 안 돼?”

경란이 머뭇거리며 진희 곁으로 다가왔다.

“당연히 되지. 그런데 갑자기 그림은 왜?”

“응. 이거 비밀인데, 절대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 돼. 알았지? 나 사랑에 빠졌어.”

“정말? 와, 그 행운의 주인공은 누구야?”

진희의 눈썹이 올라가 아치 모양을 그리며 커진 눈동자로 경란을 응시한다. 

“응. 그게 말이야……. 선생님.”

“선생님?”

“응, 미술 선생님"

경란이 달뜬 표정으로 진희에게 고백했을 때, 진희는 들고 있던 책을 떨어뜨렸다. 

“진희야, 왜 그래, 괜찮아?”

“어, 아냐. 갑자기 좀 어지러워서…….”

진희의 손이 바르르 떨렸다. 진희는 한참 동안 눈을 가늘게 뜨고 이마를 찌푸렸다.

“근데 왜 하필 미술 선생님이야?”

진희가 화가 난 듯 차갑게 묻자 경란은 잠시 붉어져 있던 뺨의 핏기가 싹 가셨다. 선생님을 짝사랑하는 일은 그 맘때 소녀들에게는 흔한 일이었다. 진희가 날카롭게 반응하는 걸 경란은 이해하지 못했다.


“진희야, 오늘은 나 먼저 갈게. 대학 들어간 사촌 언니가 집에 오기로 했거든."

경란은 가방을 들고 허둥지둥 교실을 나섰다. 집에 돌아와서도 방문을 닫고 좁은 방에서 혼자 왔다 갔다 하며 안절부절못했다. 경란은 컴컴해진 학교로 슬그머니 돌아왔다. 복도를 걷는 내내 발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걸었다. 교무실 창문 너머로 둘러보았지만 아무런 기척이 들리지 않았다. 경란은 살금살금 발걸음을 숙직실로 향했다. 숙직실에 가까이 다가가자 경란의 귀에 소리가 들려왔다. 잔뜩 긴장한 경란은 몸을 숨기고 소리에 집중하며 누가 지나가는지 지켜보았다. 경란의 손에는 며칠 내 공들여 쓴 편지와 장미꽃 한 송이가 들려 있다. 그 날이 미술 선생님의 숙직 날이라는 정보를 입수했던 것이다. 


옅은 밤색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흘러내려와 살짝 덮은 이마, 조금 마른 듯하지만 강단이 있어 보이는 몸가짐, 예술가들에게만 찾아볼 수 있는 어딘가 공허하지만 빨려 들어갈 것 같은 눈. 미술 선생님이 나타났다. 숙직실 앞을 지나 계단을 올라가는 것이 보인다. 경란은 숨을 죽이고 발소리를 죽여 살그머니 선생님의 뒤를 따라 올라갔다. 편지를 들고 오긴 했지만, 처음 마음먹었을 때의 용기는 어디로 사라진 건지, 경란은 자꾸 가슴이 뛰고 오금이 저려와 그냥 돌아갈까, 말까로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선생님을 따라 올라가서는 어떻게 말을 꺼낸담, 고민하고 있는 찰나, 교실문이 드르르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4층에 있는 교실이라면 아마 미술실인 모양이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기를 기다렸다가 경란은 마지막 한 층을 살금살금 올라간다. 


경란은 숨이 멎는 것 같다. 희미한 불빛 아래 미술 선생님의 얼굴이 보인다. 망설이다 용기를 내어 미술실로 가까이 걸어가다, 경란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린다. 미술실 안에 누군가가 있다. 고개를 약간 숙이고 바닥을 보며 이젤 앞에 앉아있는 소녀. 경란의 왼쪽 입꼬리가 살짝 비틀어져 올라갔다. 소녀의 앞머리에 꽂혀 있는 보라색 머리핀을 경란은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었다. 그건 경란이 선물한 머리핀이니까. 


'나쁜 년!’


경란은 입술 밖으로 내뱉지 못한 말을 속으로 씹어 삼켰다. 선생님이 오른손을 소녀의 어깨에 올리자 그림을 그리고 있던 소녀의 팔이 순간 경직되며 로봇처럼 뻣뻣해진다. 어깨 위에 있던 손이 곧장 허리로 내려와 소녀의 가는 허리를 감싸 안는다. 경란이 마른침을 삼킨다. 선생님의 손이 허리에서 가슴 쪽으로 더듬어 올라가더니 교복 앞섶의 단추 두 개를 푼다. 경란이 사모하는 여인의 손처럼 가늘고 섬세한 예술가의 손이 단추가 풀어진 앞섶을 헤집고 들어간다. 소녀는 입을 앙다문 채 눈을 감고 있다. 감고 있는 눈꺼풀이 바르르 떨린다. 경란은 숨조차 쉴 수 없다. 주먹을 꼭 쥐고 서 있는데 심장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듯 무섭게 뛴다. 경란은 견디지 못하고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저 년이 꼬리 친 거야.’


‘꼬리 치기’에서 ‘걸레’나 ‘창녀’로 넘어가는 건 시간문제다. ‘꼬리 치기’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당사자의 행위와는 무관하다. 오히려 관찰자가 보고 싶은 것을 보고 그에 의해 정의된다. 경란은 오랜 시간 열광적으로 빠져들었던 진희에 대한 사랑이 싸늘하게 식는 걸 느꼈다. 경란은 이를 악물고 학교 운동장을 가로질러 달린다. 경란의 두 볼에 고통과 비탄, 상실감과 슬픔, 분노와 모욕감, 자기 비하와 배신감이 녹아들어 간 쓴 물이 흘러내린다. 


남자들은 - 선생들도 예외가 아니다 - 아름다운 것을 소유하고 제 것으로 만들고 싶어 한다. 아름다움을 철저하게 유린하고 더럽히는 것으로 소유할 수 있을 거라 믿는다. 경란 역시 아름다운 것을 모독하고 더럽히고 싶었다. 아름다움을 처참하게 더럽힘으로 아름다움을 소유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똥칠을 했다.

경란은 열일곱 살 아름다운 진희의 얼굴에…...

경란의 엄마는 그림 속 중년이 된, 여전히 아름다운 진희의 얼굴에…...


경란은 하루 종일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아름다움을 파괴한 뒤에 얻는 쾌락. 하지만 웃음 뒤의 헛헛함은 먹을 것을 아무리 많이 쑤셔 넣어도 채워지지 않았고, 빼앗긴 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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