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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소희 Dec 25. 2023

변명의 여지없이 자유로운 걸

선택

마흔부터는 자신의 얼굴에 책임져야 한다는 말을 들은 적 있다. 매 순간 짓는 표정이 삶에 대한 내 태도를 반영할 테고, 그 표정으로 인한 섬세한 주름들이 인상을 변화시킨다. 잠시 거울을 보며 얼굴에 나타난 삶에 대한 내 태도들을 돌아본다.



똑같이 비가 내려도 싱그러운 흙냄새와 초록의 내음에 기뻐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물에 젖는 게 짜증 나고 우산 드는 게 귀찮은 사람도 있다. 비를 흠뻑 맞고 길을 걷는 걸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빗방울이 한 방울이라도 몸에 튀면 화를 내는 사람도 있다. 어쩌면 이런저런 사람이 세상에 따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한 사람 안에 이 모든 모양의 마음이 공존하는지 모른다. 순간순간 내 안에 어떤 마음을 담느냐에 따라 표정도, 언어도, 행동도 따라서 달라진다.



20대 초반까지 나는 어떤 상황에서도 빛을 발견하고 찬란하게 웃을 수 있었다. KBS 아나운서실을 깊은 고민 없이 박차고 나와 인생의 쓴맛을 보게 된 후, 삶의 태도가 차갑고 쌀쌀해졌다. 감성을 닳아빠진 가죽처럼 무디게 만들었는데 고통을 느끼지 않으려는 발버둥이었다. 상처 난 가슴은 사막처럼 점점 황폐해졌고, 모든 게 고난 탓이라며 삶의 잔인함을 저주했다. 하지만 정말 그 모든 일이 내가 어떻게 해볼 도리도 없이 지진해일처럼 밀려들기만 했을까.


인간은 자유롭도록 저주받았다
-장 폴 사르트르


주위를 보면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산다는 사람은 별로 없고, '해야 하는' 일을 억지로 하는 사람이 훨씬 많다. 처자식을 먹여 살리려고 정나미 떨어지는 직장에 매일 출근하는 사람들, 자식 키우느라 인생을 모두 희생했는데 자식들이 알아주지 않아 서럽다는 사람들, 온통 기름지고 건강에 해로운 인스턴트 음식이 세상을 도배하고 있어 자꾸 살이 찔 수밖에 없다는 사람들. 나 역시 선택의 순간마다 그렇게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하며 살아왔다. 이렇게 지금 하는 일 외에 다른 선택의 자유가 없다고 스스로 하는 거짓말을, 사르트르는 'Bad Faith'라고 불렀다. 냉정히 말하면 세상에 '해야만 하는 일'이란 없다는 것이다. 모두 나의 선택일 뿐.


많은 사람이 '자유가 없다'라고 변명하지만, 그건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거짓말일 뿐이다. 자신에게 선택권이 있고 온전한 자유가 있다는 걸 인정하면, 모든 비난과 책임이 자기에게 날아오니까 싫은 것이다. '아, 그래도 정말 이 선택밖에 할 수 없는데' 변명하려는 우리에게 사르트르는 일침을 놓는다.


변명의 여지없이 홀로 남겨져 있다
-장 폴 사르트르


이래서 그랬고, 저래서 그랬고..., 이유야 많지만, 결국 다 변명이다. 모두 다 내 선택이었다. 그 모든 선택의 결과로 지금의 내가 있는 거고.


지금 내가 무엇을 하든 그건 변명의 여지없이 내 선택이다. 누가 뭐래도 내게는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 월급 많은 직장을 그만두고 월급은 적지만 마음이 편한 직장으로 옮길 수 있다. 타고 다니던 차를 포기하고, 외식의 횟수를 줄여야 되겠지만, 그것도 내 선택의 결과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처럼 보여도, 내 앞에는 수없이 많은 선택지가 놓여 있고, 나는 그중 하나를 선택할 자유가 있다. 자유가 없다는 비겁한 변명은 집어치우자.



이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오히려 가벼워졌다. 운명의 덫 같은 것에 걸려 어쩔 수 없이 끌려온 삶이라고 생각했을 때는 정말 쇠사슬에라도 묶인 듯 갑갑하고 화가 났었는데, 그 모든 것이 결국 내 선택이었다는 걸 인정하고 나니 묶여 있던 사슬이 툭 하고 풀려버린 것 같았다. 자갈길이든, 진흙길이든, 삶의 경계를 넘나들 깊은 늪이든, 노에처럼 억지로 끌려갔던 게 아니고 내 자유의지로 저벅저벅 걸어갔던 거였다. 험한 길을 뚜벅뚜벅 걷고 있는 어린 내 모습이 눈앞에 펼쳐지자, 그제야 내가 걸었던 그 길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운명 탓, 남 탓하며 척박해졌던 마음에 밤사이 이슬이 내렸다. 더 이상 찌푸리고 화난 얼굴로 세상을 노려볼 필요가 없어졌다.


똑같은 행동을 해도 내가 자유롭게 선택했다고 여기는지, 어쩔 수 없었다고 여기는지에 따라 삶에 매우 큰 차이를 가져온다. 자유로운 선택은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삶이 무기력에 짓눌려 쓰러지지 않도록 도와준다. 사회 심리학자 로터에 따르면, 어떤 일의 결과가 자신의 탓이라고 믿는 사람은 쉽게 무기력에 빠지지 않지만, 운명이나 주변 여건 탓이라고 생각하는 외적 통제 성향인 사람들은 무기력에 빠지기 쉽다. 



심리학자 페라리는 양로원에 입원하는 노인들에게 어느 정도 선택의 자유가 있었는지 물었다. 노인 40명 중 22명은 다른 대안이 없다며 가족이 신청서를 냈고, 18명은 스스로 신청을 했다. 가족이 신청한 22명 중 19명이 신청한 후 한 달 내에 사망한 데 반해, 스스로 신청한 18명 중 한 달 내 사망한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자유가 없다고 느끼는 것, 스스로 통제할 수 없다고 느끼는 무기력이 사망에 이르게 할 만큼 치명적이라는 사실에 소름이 돋았다. 그 외에도 요양병원 내 노인들의 행태에 관한 많은 연구들이 진행되었는데, 노인을 위한다고 모든 것을 시중들어주고 대신해 주는 것보다는 노인들이 직접 옷을 골라 갈아입고 작은 화분이라도 키울 수 있도록 사소한 선택의 권리를 존중해 줄 때 생존율이 훨씬 높아진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벽지 일부를 바꾼다든지, 머리 스타일을 바꾼다든지 하는 아주 사소한 선택이 나를 살게 한다.


물론 인간의 자유를 가로막는 장애물은 엄연히 존재한다. 권력이나 권위로, 협박으로, 힘이나 폭력으로, 그럴듯한 논리로 세상은 끊임없이 내 생각과 행동, 감정까지도 강요한다. 여러 가지 이름을 붙여 어떤 역할을 강요하기도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변명할 여지없이 자유롭다.



모양과 높이는 달라도 삶에는 항상 장애물이 있다. 불행과 고통 가운데 있을 때는 스스로 저주받았다고 생각하며 도무지 다른 선택지가 없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나 자신을 바닥까지 끌어내릴지, 아니면 내 삶을 그대로 끌어안고 일어날 것인지는 내 선택에 달렸다. 행복이나 불행은 운명이나 상황에 의해 주어지는 게 아니고 자유로운 내가 선택하는 것이다. 내 눈앞에 펼쳐진 상황이나 내게 일어난 일들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삶의 태도는 전적으로 내 선택이다. 


지금 내 모습은 그동안 내가 해온 선택들의 합이다. 앞으로 내 미래는 거기에 지금부터 하는 내 선택들이 더해져 결정될 것이다.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처럼 무력하게 느껴지는 그 순간에도 우리는 선택할 수 있다. 많은 것들이 나를 방해하겠지만, 그 어떤 것도 진정으로 내 자유를 막을 수는 없다. 


<그리스인 조르바>를 쓴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비 명에 적힌 글귀처럼 "나는 자유다."




윤소희 작가 _ 시라쿠사

책 읽어주는 작가 윤소희



2017년 <세상의 중심보다 네 삶의 주인이길 원해>를 출간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06년부터 중국에 거주. ‘책과 함께’라는 커뮤니티를 운영하며 책 소개와 책 나눔을 하고 있다. 

전 Bain & Company 컨설턴트, 전 KBS 아나운서. Chicago Booth MBA, 서울대학교 심리학 학사. 

저서로는 <세상에 하나뿐인 북 매칭> <산만한 그녀의 색깔 있는 독서> <여백을 채우는 사랑>, 

공저로 <소설, 쓰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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