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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thos Mar 05. 2023

첫 물에 커피 불릴 때 나는 소리

내가 제일 좋아하는 소리

수많은 단어들 중에 '좋아한다'라는 말을 제일 좋아한다.

이 단어는 묘한 매력을 지녔다.

말로 표현하지 않고 마음속으로만 외쳐도 '설레임'을 준다.

상상만으로도 행복감을 주는 이 끌리는 단어는 그 대상에 따라 느낌이 다르다.




늦잠의 달콤한 유혹을 물리치고

일요일 아침 내가 찾는 좋아함의 대상은 단연코 '커피'다.

routine까지는 아니지만 특별한 상황이 아니고서는 나는 일요일에 일찍 일어난다.

모두가 잠든 시간에 내가 제일 좋아하는 '커피'라는 대상을 만나기 위해서다.


젊은 시절 커피와의 만남은 그리 좋은 것은 아니었다.


첫 번째는 고등학생 시절 독서실에서 밤을 새울 때 잠을 쫓기 위한 각성제로써의 만남이다.

심지어 이때는 물에 타지 않고 그냥 봉지에 있는 커피를 입에 털어 넣었다.

입안에 들어간 대기업 커피 가루는 처음엔 쓴 맛이 나고 중간쯤엔 단 맛이 나며, 마지막에는 고단하고 외로운 고딩시절의 아픈 추억처럼 침과 섞여 잇몸 사이에 끈적끈적한 액체로 달라붙어 단맛과 쓴맛의 그 어느 지점의 맛을 느끼게 했다.


두 번째 만남은 대학생이 되어 눈치 보지 않고 당당하게 피우는 담배와의 악연이다.

담배와 대기업 커피와의 찰떡궁합은 정말 환상 그 자체이다. 불을 붙여 담배 한 모금을 마시면 내 손은 어느새 달콤 씁쓸한 대기업 커피에 물을 따르고 있다.

이렇게 몸에는 지극히 해로우나 정신적으로 더할 나위 없이 행복을 주는 커피와 담배와의 악연은 6년 간이나 지속됐다(대학4년, 군대2년). 졸업하자마자 임용고사에 합격하여 교사가 되었을 때 학생들이 내 몸에서 담배 냄새가 난다고 해서 그날 바로 담배를 끊어버렸다. 25년이 지난 지금까지 담배 피우는 악몽을 꾼 것을 제외하곤 단 한 번도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지금의 커피와의 만남은 세 번째부터다.

박사학위 논문을 마무리하기 위해 1년 휴직을 할 때 지금의 커피를 만났다. 그동안 대기업 봉지 커피만 마셨는데 점심식사 후 우연히 들어간 작은 카페에서 '아메리카노'를 마셨다. 그 첫 만남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테이블이 네 개밖에 없는 작은 카페에서 마신 아메리카노는 10년이 넘게 길들여진 대기업 커피와는 전혀 다른 향기와 맛을 제공해 주었다.


그때부터 맺어진 싱글 오리지널 스페셜 커피와의 만남은 고요한 일요일 아침을 기다리는 일상이 되었다.




내가 좋아하는 원두는 동네에 있는 작은 카페집 사장이 직접 로스팅한 ETHIOPIA AVAYA GEISHA이다.

매주 250g 한 봉지를 1만 3천 원을 주고 구입하는 이 원두는 내 코와 혀를 자극함에 있어 거침이 없다.


먼저 커피포트에 물을 끓인다. 물이 끓는 중에 원두 10g을 그라인더에 넣어 가루를 만드는 그 짧은 순간, 온전히 손잡이를 돌리는 일에만 집중할 수 있어 좋다. 뿐만 아니라 원두가 갈리는 소리는 평일 일을 하면서 받았던 스트레스도 함께 사라지게  만드는 마법을 부린다.


커피가루는 첫 물에 봉긋한 언덕이 된다



끓는 물을 가루 원두에 넣고 30초 간 불리는 시간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순간이다.

물을 부으면 평평했던 가루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봉긋한 언덕이 된다.

또한 언덕이 되면서 나는 소리는 마치 한지로 만든 방문을 열면 들렸던 초가지붕에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처럼 내 몸과 마음을 고요하고 차분하게 만든다. 흡사 충남예산 수덕사 가는 길에 들었던 졸졸 시냇물 소리 같다.


첫 물에 자기 몸을 불리는 커피소리





그리고 커피와의 추억하나 더

21년 전 신혼여행 왔던
제주도 그 카페에서 커피 한 잔 마신다.
변한 건 아내와 내 모습이고
창 너머 바다는 그대로다
참 다행이다
제주 표선해수욕장 어느 카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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