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pathos Oct 12. 2023

요즘 학교에 이런 학생도 있습니다.

"그 쓰레기 제가 버리겠습니다."

나는 출근하면 제일 먼저 밤새 묵혀있던 실내 공기를 상큼한 아침 공기로 바꾸기 위해 창문을 활짝 연다. 그런 후 화분의 꽃과 난초를 살핀다. 퇴근 전까지 건강했던 아이들이 밤새 잘 있었나 살피는 것이다. 다음엔 물을 끓이고 오전에 마실 따뜻한 차를 준비한다(얼마 전까지 커피를 탔는데 이젠 커피를 마시지 않는다).

출근하자마자 화분의 꽃을 살피듯 학생들을 보기 위해 8시 20분이 되면 밖에 나간다. "선생님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하는 아이들도 있지만 대부분 졸린 눈을 비비고 마지못해 등교하는 학생들로 인사하지 않고 그냥 지나친다. 그래도 나는 눈에 보이는 학생 모두에게 아침 인사를 한다. "학생 안녕, 얘들아 안녕, 어서 와..."


점심이 되면 학교 건물 안으로 들어간다.

친구들과 복도에서 수다 떠는 아이도 있고, 교실에서 공부를 하는 아이도 있다. 물론 부족한 잠을 보충하는 아이들도 있다.

당연히 학교에는 학생들이 버린 쓰레기가 많다. 학생들은 대부분 버리기만 하지 줍지는 않는다. 교실 수업을 할 때에는 학생처럼 쓰레기가 눈에 띄지 않았는데, 이상하게 교장이 되니 그렇게도 눈에 잘 보인다. 마치 주인공에만 유령이 보이는 것처럼 복도의 쓰레기는 교장의 눈에만 보인다.


어제도 어김없이 복도에는 아이들이 마시다 버린 찌그러진 음료수 캔이 있었다. 캔을 주운 후 뒷짐을 쥐고 계단을 올라가고 있는데 어떤 학생이 내게 말을 걸었다.


교장선생님 제가 버릴 테니 그 쓰레기 저한테 주세요.


뒤를 돌아보니 키 크고 잘 생긴 남학생이 웃으면서 말했다.


"허허, 고맙구나. 괜찮아 내가 버리면 돼"

짧게 말했지만 머릿속은 많은 생각들로 가득 찼다. (요즘 세상에 이런 학생도 있네, 인성도 좋은데 키도 크고 얼굴도 잘 생겼잖아?, 나중에 내 사위 삼았으면 좋겠다 등등등)


"아니에요. 교장선생님 제가 버릴게요. 주세요."

학생은 천사 같은 미소를 지었지만 얼굴에 반드시 내가 버릴 거야라는 다부진 각오로 손을 내밀었다.


"그래 가져가거라. 고맙구나. 몇 학년? 몇 반이니? 이름은...?"

나는 나중에 담임 선생님에게 이 학생이 어떤 아이인지 더 알고 싶어서 학번을 물었다. 기회가 되면 교장실에 불러 시원한 음료수라도 줄 생각과 함께.


그리고 이렇게 멋진 아이가 우리 학교 학생이란 것에 너무 행복했다.




인간은 행복을 추구하는 존재이다.

너무나 당연한 말,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을 아주 오래전 아리스토텔레스도 그의 아들 니코마코스에게 전해주었다(Aristoteles, '니코마코스의 윤리학'). 하지만 그가 말하는 행복은 평범한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류의 행복이 아니다.


행복이란 인간의 고유한 기능이 덕에 따라 탁월하게 발휘되는 영혼의 활동이다.


그는 인간의 고유한 기능을 합리적으로 사유하는 능력 즉 이성을 잘 발휘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따라서 인간의 이성적 기능이 덕에 따라 현실에서 탁월하게 잘 발휘될 때 나타나는 영혼의 움직임이 바로 '행복(eudaemonia)'이라는 것이다.


나 대신 쓰레기를 버리겠다고 말한 학생은,

이성이, 내재되어 있는 덕에 따라 탁월하게 발휘되어 그런 행동을 한 것이다. 결국 그 학생은 인간의 목적인 행복 달성을 위해 한 행동으로 이성(知)과 덕이 일치되어 행복에 도달했다고 할 수 있다.


행복을 느끼는 순간은 사람마다 다르다. 행복은 자신이 처한 상황에 따라 다르다. 즉 행복이란 무엇인가? 에 대한 대답은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이면 마땅히 추구해야 할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행복은 있다. 어제 오후에 만난 그 남학생의 모습에서 우리 인간이 추구해야 할 보편적인 행복을 본 것 같아서 참 행복했다.


"아 맞다. 나 학생들에게 동서양 사상을 가르쳤던 윤리교사였지!"

이런 생각을 한 나는 뼛 속까지 윤리교사였음이 자명하다.




* 쓰다 보니 이글이 브런치에 발행하는 100번째 글이 되었습니다.

* 구독자도 벌써 179명이 되었고요. 한 분만 더 오시면 180명이 되는 것은 저만 아는 비밀입니다. ^^

* 커버 사진은 제 고향 근처 바다랍니다.


이전 06화 교장실에서 수업하는 학교장입니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