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에는 오래돼서 느려 터진 엘리베이터와, 어딘가 나사가 빠진 듯 덜덜거리는 에스컬레이터들이 많다. 하루에도 수만 명이 이용하는 역사의 기계들은 빠르게 늙어가고 '나 죽겠소!' 하며 드러누워 버리는 경우도 종종 일어난다. 마음 같아서는 새로운 기계로 다 바꿔버리고 싶지만 언제나 돈이 문제다. 물론 사람이 일으키는 사고도 많기에 마냥 기계 탓만 하면 듣는 기계는 섭섭하다. 움직이는 모든 것이 그러하듯 에스컬레이터와 엘리베이터는 저마다의 위험성이 숨어 있기에 안전하게 탑승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이런 점을 알길 없는 승객들은 갑작스러운 사고에 다양한 반응들을 보이곤 한다.
추노형
이 유형은 사고를 당했음에도 현장에서 도망가 버리는 특징이 있다. 자신이 사고를 유발했음을 잘 아는 것이다. 하루는 고등학생들이 엘리베이터에 갇혔다가 구조되자마자 냅다 도망쳐버리는 것이다. 알고 보니 흥을 주체하지 못한 남학생들이 펄쩍펄쩍 뛰다 못해 움직이고 있는 엘리베이터의 문을 열면서 엘리베이터가 그 자리에서 멈춰버린 것이다. 엘리베이터 속의 조명이 오래돼 깜빡거리며 싸이키 조명 효과라도 연출한 걸까? '문이 닫힙니다.'라는 안내음이 늘어지며 '무무무문이 다다다닫힙니다.' 라고 일렉트로닉 테크노로 들렸을까? 지하철 시설이 그렇게 흥겨운 곳이라니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 혈압이 오르는 것 같다.
소풍길에 신난 초등학생이 에스컬레이터 손잡이를 힘껏 당기는 바람에 에스컬레이터가 멈춰 버린 적도 있다. 에스컬레이터에는 양쪽 손잡이의 이동 속도가 크게 달라지면 자동으로 멈추도록 안정장치가 돼있다. 덕분에 그 반 아이들은 에스컬레이터를 걸어서 올라가야 했다. 유독 깊은 역이었다. 모두들 가뿐 숨을 몰아쉬며 일제히 누군가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 시선들이 어찌나 따갑던지 나라도 위로의 눈길을 보내려고 했는데, 웬일인지 내 눈을 자꾸만 피했다. 나는 진짜로 위로의 눈길을 보냈는데.
마음만은 마동석형
양손에 짐을 잔뜩 들고, 또는 자전거나 무거운 수레를 끌고 에스컬레이터를 이용하다 중심을 잃고 넘어져 생기는 사고에서 보이는 유형이다. 에스컬레이터 사고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CCTV를 보기 전까지 자신의 근력을 믿고 에스컬레이터의 오작동을 의심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에스컬레이터에서는 근력보다 자신감이 강하면 기본이 3중 추돌이다. 넘어지면서 다치고, 물건에 깔려서 다치고, 넘어지면서 뒷사람 밀어서 같이 다치게 된다. 물론 자신감 있는 삶의 태도는 칭찬하지만, 승강기 이용 중에는 자신을 의심하고 또 의심하자.
역주행형
나는 멀쩡히 잘 가고 있었는데 갑자기 에스컬레이터가 역주행을 했다고 주장하는 유형이다. 멜론 차트를 역주행하는 것만큼이나 에스컬레이터가 역주행 하기는 힘들다. 실제로 역주행한다면 한동안 뉴스에 ○○역 에스컬레이터로 도배가 될 것이다. 나라의 높은 분들까지 에스컬레이터와 사진을 찍기 위해 친히 방문하실지도 모른다. 사실 이 유형은 중심을 잃은 마음만은 마동석형 고객에게 밀려 넘어진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런 경우 치료를 받아야 한다면 원인을 제공한 고객에게 치료비를 청구해야 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다들 에스컬레이터에게서 치료비를 받고 싶어 한다. 에스컬레이터가 유명해져서 돈 벌기를 바랄 수도 없고, 난감하다.
누가 그러던데형
지하철에 대한 잘 못된 소문이 몇 가지 있는데 그중 가장 바로잡고 싶은 것이 있다. 바로 지하철에서 다치면 무조건 돈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비도 안 오는 날 멀쩡한 평지에서 넘어지셨다고 하면, 우리 역은 10번 출구가 없는데 10번 출구 에스컬레이터를 찾으시면, 역무원들은 참 답답한데 정말 답답한데 어떻게 표현할 방법이 없다. 소문의 출처는 병원이라고도 하고, 자녀분들, 또는 노인정 친구분들이라고도 한다. 아주 예전에 민원 방지 차원에서 웬만한 사고는 보험처리를 해준 적이 있다는 카더라가 있긴 하다. 하지만 요즘은 지하철 회사에 귀책사유가 없는 이상 보상해 주지 않고 있다.
보살형
내가 미처 알지 못했던 새로운 유형을 발견한 것은 규모가 제법 큰 역에서 일할 때였다. 농담 조금 보태서 새벽마다 멈춰 서는 낡은 엘리베이터가 있었다. 수리를 받아도 그뿐, 고장의 원인이 명확하게 밝혀지지를 않았다. 아침마다 수리를 받으며 연명하던 엘리베이터는 그날따라 초저녁에 뻗어버리고 말았다. 하필 휠체어를 탄 고객이 탑승한 채로 말이다. 비상인터폰 호출을 받은 나는 지상에 있는 엘리베이터 제어반으로 헐레벌떡 달려갔다. 안에는 일행인 듯 보이는 휠체어를 탄 고객과 일반인 고객이 타고 있었다.
우선 고객들을 먼저 안심시키자.
"직원입니다. 안심하시고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여기까지 좋았어. 이제 엘리베이터 리셋 실시!
성고ㅇ...응?
리셋된 듯했던 엘리베이터는 갑자기 아래로 내려가 버렸고, 그대로 다시 뻗어 버렸다. 식은땀이 났다. 지상에 있는 나로서는 엘리베이터가 어디쯤 걸쳐져 있는 건지, 대합실까지 제대로 내려간 건지, 문은 열린 건지 알 수가 없어서 어떤 조치도 섣불리 할 수가 없었다. 그때 역무실에서 CCTV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동료 역무원에게서 전화가 왔다. 엘리베이터가 대합실에 반쯤 문이 열린 채로 멈췄다고. 나는 다시 대합실로 달려갔다. 일반인 고객은 이미 반쯤 열린 문으로 엘리베이터를 빠져나와 있었다. 동료와 나는 반쯤 열린 엘리베이터 문을 마저 열고 휠체어를 탄 고객을 구조할 수 있었다.
지상까지 가는 시간, 리셋 한 엘리베이터가 살아나기까지 기다린 시간, 다시 대합실로 달려간 시간, 그리고 수동으로 문을 여는 데까지의 시간. 어림잡아도 10분은 지났을 것이다. 너무 오래 걸렸다. 게다가 휠체어 탑승자에게 엘리베이터는 유일한 이동 수단이지 않은가. 10분 동안 내가 흘린 땀과는 관계없이, 고객이 화를 내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다.
"재밌었다, 그지?"
응? 의외의, 아니 말도 안 되는 반응이었다. 두 사람은 깔깔 웃으면서 엘리베이터를 떠났다. 실로 경이로운 장면이었다. 하루하루를 연명하던 낡은 엘리베이터가 저렇게 의연한 보살형 손님들을 태우고 뻗어버린 것은 내게는 정말 기적 같은 행운이었다. '살았다!'라는 강한 안도감이 밀려왔다. 늦은 구조에 대한 민원도, 상사에게서 들을 질책도 걱정할 필요가 없어졌다. 구조는 내가 했지만 그날 밤 구원받은 것은 나였다.
예기치 못한 사고는 평소에 보살이던 사람들의 평온함도 쉽게 깨뜨려버린다. 그러니 보살형은 쉽게 볼 수 없는 것이 당연하고, 굳이 보살이고자 할 필요도 없다. 다만, 역무원들도 사람이기에 실수를 하고, 역의 기계들은 기계이기에 가끔 오류를 범하기도 한다. 게다가 역사의 낡은 기계들은 가끔 듣도 보도 못한 고장을 일으키기도 한다. 내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서 눈앞에 고객이 마냥 기다려야만 할 때는 정말 당황스러워서 머리가 하얘진다. 그럴 때 고객이 의연하게 기다려주는 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된다.
승객이 갇혔다는 신고에 놀란 엘리베이터 수리 업체 직원이 도착했다. 이미 여러 번 신고와 수리를 반복했던 것을 알기에 업체 직원은 잔뜩 기가 죽은 채였다. 업체 직원도 고치고 싶은 마음이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각 역사마다 엘리베이터의 제조사가 다르고 설치 시기와 모양도 다르다. 오래된 제품들은 부품을 구하기도 쉽지 않다. 그들에게도 나름대로 어려운 사정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누군가에게 보살형이었던 적이있었던가? 고객에게 바라는 그런 의연함을 나 스스로가 보여줬던 적은 있었던가? 그날은 나도 보살형이 되기로 했다.
"괜찮아요. 천천히 봐주세요."
지상과 지하를 뛰어다닌 탓인지, 저마다 조금씩 나눠가진 안도감 덕분인지 그날 밤은 지하의 공기가 훈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