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수생의 일기를 연재한다는 사실을 주변에 알린 뒤, 기숙학원 동지들에게 다양한소재거리 제보를 받았다.그중 보자마자 '아 이건 또 무조건 한편 써줘야지~'했던 아주군침 싹 도는 주제가 있으니
그것은 바로 야식!먹는 얘기!!
결국 다~ 먹고살자고 하는 일인데 이 주제가빠지면 또 섭하지 않겠는가? 그럼 바로 시작하겠다.
(삼수생의 일기에 언급되는 모든 이야기는 n년 전 강남대성기숙학원과 그 인근 학원들을 기준으로 합니다. 현재와는 다소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
.
.
기숙학원 급식은 정말 화려하다
사실 화려할 수밖에 없다. 무조건 맛있어야만 한다. 삼시세끼를 전부 학원에서 먹는데 급식이맛이 없으면 가뜩이나광기 어린 재수생들이 집단 쿠데타를 일으키거나 집으로 탈주할 것은불 보듯 뻔한 일이기에.
경기도 이천에 위치한 나의 기숙학원은 갓 공수한(?) 이천쌀로 이천쌀밥을 지어줬다.'이천쌀이라고 진짜 뭐가 달라?' 처음엔 반신반의하며 먹었지만 실제로 밥이 정말 맛있었다. 아님 그냥 강대기숙 급식실 조리사분들이 밥 짓기의 달인이었던지.
원하는 만큼 퍼가고 자유롭게 남기는 뷔페식이었고, 메인반찬, 김치류는 꼭 두 가지 이상씩 있었다.신선한 과일, 빵 등등 후식도 늘 다양하게 준비됐다.
학교 급식에 있는 '맛있는 거 나오는 날' (보통 수요일, 이른바 수. 다. 날: 수요일은 다 먹는 날, 특식데이 등등) 급의 메뉴가 매일매일 준비됐다고 상상하면 쉽다. 웬만큼 입 짧은 소식좌들도 학원 급식이 상당히 잘 나오는 편이었다는 건 부정하지 않을 것이다. 일주일에 한 번씩 기숙학원으로 외근을 오는 외근직 강사님들께도'여기 급식소 참 맛집'이라고소문이자자해 시간이 부족해도 꼭 밥을 챙겨드시고 가셨었다.
급식만 잘 나오는 게 아니라 매일매일 간식도 줬다.
오후 10시, 자습 종료 30분 전 종이 울리면 당번들은 식당으로 가 각 반에 해당되는 간식상자를 가져왔다. 흡사 초등학생 때 우유급식 할 때 쓰이던 플라스틱상자에는 그 당시 가장유행 타는 인기간식이나 신제품 1종+음료로 구성된 세트가들어있었다.
요즘에는 탕후루, 약과 뭐 이런 거 나오려나?
아직도 기억나는 건 이거다.
[쁘띠첼 아이오아이 에디션]
참으로 내가 입시하던 시기를 투명하게 예측해 볼 수 있는 간식이다;TV도 인터넷도 못 하는 문외한 재수생들끼리 인기 멤버 띠부씰 나오면 좋아하고 그랬다. 그때도 김세정은 인기가 많았고, 전소미가 솔로로 이렇게까지 성공할 줄은 아무도 몰랐다.
.
.
.
내가 먹을 음식을 내가 결정할 수 없을 때, 즉 식사메뉴에 대한 결정권을 박탈당했을 때 가장 주기적으로 생각나는 음식이 어쩌면 가장 맛있는 음식인 것 아닐까?
이렇게 아무리 맛있는 식사와 간식들이 365일 다른 메뉴로 준비된다 해도 재수생들이 늘 주기적으로 노래를 부르는 야식이 딱 한 가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국민 소울푸드 [라면] 되시겠다.
나는 라면은 '저렴한 가격과 손쉬운 접근성' 때문에 맛에 비해 평가절하된 대표적인 한식이 아닐까,종종생각한다. 흔히 '밥값이 부족해서 라면밖에 못 먹는다' or '먹을게 마땅치 않을 때 어쩔 수 없이 먹는 음식'이라고 표현되는대표적인 서민음식이 라면이라지만,재수학원에서의 실상은 다르다.
재수생들은 그렇게 라면을 좋아했다.
.
.
.
그래서 기숙학원에는 한 달에 한번 라면데이가 있었다.
그날은 다른 날처럼 당번이 간식상자를 들고 올라오는 게 아니라, 식사 시간처럼 다 같이 식당으로 내려갔다. 오후 9시 반, 라면이 가장 맛있어지는 시간에!내려가는 길은 이미 온 복도에 라면 향기가 가득했다. 식당에 도착하면 그 넓은 공간에서 컵라면 800개가 동시조리되고 있는 진풍경이 펼쳐졌고.
학생들은 알루미늄 포일컵에 소분된 김치까지 포함된야무진 1인 1 라면세트를 받아 들고는 행복해했다.컵라면 종류는 매달 달라졌기 때문에 무슨 라면인지 향으로 유추해 보며 계단을 내려가던 그 길이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다.그리고 사실 그때는 공부 빼고 다른 뭔가를 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기쁨이다.
라면이 가장 맛있는 시간 밤 9시에,
친구들과 다 같이 먹는
남이 끓여준 컵라면의 맛은...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입시가 끝난 뒤부터, 신기하게도 나는 라면을 별로 먹지 않는다. 먹어도 그때만큼은 맛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