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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자씨 Jun 09. 2024

살면서 당한 가장 큰 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학교 1학년때였다. 감기몸살 기운이 있어 학교를 조퇴하고 엄마 가게로 갔다.(가게이자 우리의 집이기도 했던 곳이었다.) 당시 부모님은 고깃집을 운영하고 계셨다. 한번 술을 마시기 시작하면 최소 1주일은 지속되는 아빠의 술부림으로 인해 가게운영은 거의 엄마 혼자 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날도 어김없이 아빠는 숙취에 찌들어있었고, 엄마는 아픈 몸을 겨우겨우 움직여 가게일을 하고 있었다. 엄마에게 감기 기운이 있어서 조퇴하고 왔다는 말을 하고는 약국으로 기약을 사러 가는 길이었다. 사거리 모퉁이에 있는 약국 맞은편에서 신호등이 없는 건널목을 건너가려는 찰나였다. 나는 분명히 길을 건너는 중이었는데 정신을 잃었다. 잠시 의식이 돌아왔을 때는 누군가 나를 안고 차에 태우는 것 같았다. 빠한테서 자주 나는 알코올 냄새가 났다.


'아빠인가...?'


다시 의식이 완전히 돌아왔을 때 나는 병원 응급실에 누워있었다.


"저기요... 저기요?"


주변을 둘러보니 바쁘게 움직이는 간호사 보였다.


"여기 어디예요...? 엄마한테 전화 좀 걸어주세요..."


간호사님은 퉁명스러운 얼굴을 한채 나에게 금일 병원(가명) 응급실이라고 말하며 전화기가 있는 쪽을 턱으로 가리켰다. 아직 뭐가 어떻게 된 일인지 사태 파악이 안 되었지만 몸이 움직여지니 전화기가 있는 쪽으로 걸어가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나 교통사고가 난 것 같은데... 지금 여기 금일 병원 응급실에 있어."


전화기 너머로 엄마의 음성이 떨려왔다.


"뭐? 어느 병원이야...? 엄마가 지금 갈게!!"


금일 병원 응급실은 우리 가게에서 걸어서 5분 정도의 가까운 거리였다. 다행히 가까운 곳에 병원이 있었고 엄마는 내 전화를 받고 헐레벌떡 가게에서 나와 병원으로 오는 길에 사고가 난 곳에서 노상 판매를 하시던 할머니로부터 사고현장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고 했다.

 

"회색 갤로퍼 차에 여학생이 치였는데 공중으로 몸이 붕 떠서 길바닥에 툭 떨어졌다니까~ 에고고... 세상에 그 학생 살아있으려나 몰러... 엄청 세게 부딪혀서 몸이 공중에 떴다가 떨어졌는데 사고 낸 차에서 사람이 내리더니 급하게 학생 싣고 병원에 가더라고..."


다시 의식을 잃었던 건지 잠시 잠에 든 건지 모르겠지만, 겨우 전화를 하고 다시 누웠던 침대에서 눈을 뜨니 엄마의 얼굴이 보였다. 겉으로 피가 나거나 부상이 육안으로 확인되지 않고, 구급차에 실려온 환자도 아니었기에 그냥 방치되어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분명히 나는 의식을 잃었고, 교복을 입고 있었다. 호주머니에 있던 지갑 속에는 학생증이 있었는데 왜 병원 측에서는 보호자에게 연락조차 취하지 않고 나를 방치해 두었을까.


잠시뒤 술에서 덜 깬 아빠도 병원에 도착했다. 그런데 사고를 낸 차량 운전자가 없는 것이다. 잠시 후 병원장이라는 사람이 내려왔고 사고차량 운전자가 병원에 환자를 이송했기 때문에  뺑소니가 아니라고 했다. 소니이건 아니건 보호자도 오지 않았는데 사고당사자가 현장에 없다니 당황스러운 상황이었다.


아빠와 엄마가 나에게 와서 그 당시 상황을 물었다. 내가 기억하는 장면은 약국으로  가던 중 의식을 잃었고, 잠시 정신이 들었을 때 누군가 나를 안고 차에 태운 기억뿐이었다. 아빠한테서 자주 나던 알코올냄새가 났고, 희미하지만 차 뒷좌석에서 운전자와 옆사람이 나눈 대화내용이 기억났다.


"내가 운전한 걸로 하자."


검사를 마치고 나온 나는 입원실에 누워 사고당시 기억하는 내용들을 엄마와 아빠에게 해주었다. 부모님은 사고 후 나를 구급차로 이동하지 않은 부분과, 응급실에서 보호자에게 연락도 취하지 않고 환자를 방치해 둔 부분에 대해 병원 측과 이야기하던 도중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사고를 냈다고 주장하는 운전 금일 병원 원 절친한 사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사고 다음날 운전자가 병원에 나타났다. 부모님은 사고 당일이 아닌 다음날 나타난 것에 대해 음주운전을 한 것이 아니냐며 물었고, 운전자대신 병원장이 나서며 답하길, 음주가 아닌 것을 자신이 사고당일 확인했다며 답변했다고 한다.


운전자는 약간의 접촉사고였고 신속히 병원으로 이동했으니 별 문제없다는 식이었고, 병원장은 육안으로 보이는 외상이 없고 검사결과 특별한 이상이 없다는 식으로 이야기했다. 그런데 나는 계속 속이 메스꺼워 토할 것 같은 느낌과 목 부분을 움직일 수 없는 고통을 호소했다. 부모님은 병원장과 운전자가 무언의 눈길을 주고받고, 걱정 말라는 식의 이야기를 서로 나누는 것이 이상하고 꺼림칙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우리는 병원을 옮겨 다시 검사를 받기로 했다. 병원을 옮겨 재검사를 받은 결과 경추 7번과 흉추 1,2번이 골절상태였다. 새로 옮긴 병원 담당의사 선생님께서는 사고당시 바로 목부분을 고정해야 할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은 금일 병원의 태도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하셨다.  


부모님은 경찰에게 이러한 상황들을 호소했으나 사고당시 운전자가 환자를 바로 병원으로 이송했고, 사고 당일 음주측정이 되지 않았기에 법적으로 문제 될 것이 없다는 식이었다고 한다. 사고당시 내가 어렴풋이 맡았던 알코올 냄새와 내가 들었던 대화내용은 증명할 길이 없었다. 합의 중 알게 된 사실은 사고를 낸 운전자는 내가 살던 지역의 큰 절에서 일하시는 처사님이었다고 한다. 부모님이 절에 다니는 것을 알고는 불심에 호소하며 선처를 구했다고. 결국 부모님은 300만 원의 합의금을 받고 합의해 주셨다고 했다. 아마도 부모님께서는 이미 난 사고를 되돌릴 수도 없고, 나의 목숨과 건강을 담보로 값을 매긴다는 것 자체가 불편하 것이다.


그 당시 사고로 인해 나는 두 달 가까이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거북이 등껍질 같은 보조 장치를 목과 몸통 전체에 하는 착용한 채 바로 누워서 잘 수도 옆으로 누워서 잘 수도 없었다. 퇴원 후 학교에 가긴 했지만 거의 오전수업만 받고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목과 등 쪽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앉아있는 것 자체가 너무 힘들어서 계속 고개가 책상으로 저절로 떨구어졌다. 그렇게 나의 중학교 1학년 1학기는 거북이처럼 느릿느릿 흘러갔다.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부모님께 주변 분들이 이야기해 주시길 목부터 머리 쪽을 다치게 되면 합의금은 무조건 1000만 원부터 시작한다고 했다. 후유증 때문이기도 하고 그만큼 목숨과 직결된 부위이기 때문이라고. 어쨌든 이미 합의는 한 뒤였고, 내가 멀쩡히 살아 있으니 우리 가족은 그걸로 되었다 생다.


엄마는 지금까지도 내가 목어깨 쪽을 불편해하거나 머리가 아프다고 하면 이 사고를 떠올리신다. 자신 때문이라며 자책을 하시기도, 그 당시 사고를 냈던 운전자와 금일 병원 원장이야기를 하시면서 울분을 토하시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맨몸으로 갤로퍼가 앞범퍼가 찌그러질 정도로 세게 부딪혔는데 이렇게 멀쩡히 살아있다는 것이 그저 감사할 뿐이라고.


사실 교통사고 후유증은 생각보다 여러 방면으로 그리고 아주 길게 나를 괴롭혔다. 사고 뒤로 나는 심한 두통을 자주 겪었고, 눈 근처 코뼈 안쪽에서부터 피냄새가 나기도 했다. 코피도 자주 흘렸고, 눈앞이 뿌옇게 변하면서 극심한 두통이 찾아오기도 했다. 목과 어깨는 늘 돌덩이처럼 뻣뻣하게 굳어서 곰 100마리가 매달려있는 것 같았다.  








만약 그날 내가 그 시간에 약국에 가지 않았다면 사고가 나지 않았을까? 만약 내가 아프다고 조퇴하지 않았다면 그 사고가 일어나지 않았을까? 다시 되돌려서 없었던 일로 만들 수 있다고 해도 또 다른 사고가 나지 않는다고 누가 보장할 수 있을까.


이따금 삶 속에서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일들을 만나고는 한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내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그런 일들. 그 속에서 우리는 되돌릴 수 없는 선택에 대한 후회를 하기도, 엄청난 불안과 초조함으로 나의 지금을 고통 속에 빠뜨리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내가 습관처럼 되뇌는 말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생은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연속이다. 사고가 났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지금 이렇게 건강하게 살아있다. 비록 힘든 회복 과정이 있었지만, 어쩌면 그 고통들로 인해 내가 더 건강해지려고 애썼던 것일 수도 있으니까.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머릿속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말을 떠올리면, 아주 눈곱만큼의 긍정적인 부분이라도 생각해 내게 된다. 하늘이 온통 구름으로 뒤덮여 있더라도 햇살 한가닥은 늘 비치기에.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일들에 집착해서 불안하고 초조해 하기보다,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일들을 해낼 수 있는 용기를 낼 수 있는 사람이기를 늘 기도한다.


지나간 일을 붙들며 자책하고 후회하고 원망하기보다,

지금 나를 붙들고 있는 일들을 행하고 긍정하고 희망하기를.


며칠 전 주차를 하던 중 운전미숙으로 주차되어 있는 다른 차와 접촉사고가 났다. 좁은 주택길에서 반대편 우체국 트럭을 피하다가 주차되어 있던 오른쪽 편 차량이 있는지조차 아예 인지하지 못했다. 우리 차량과 상대차량의 파손이 생각보다 심해서 보험처리를 하고 차는 수리에 들어갔다. 딸아이와 엄마는 차에서 내린 뒤 나 혼자 주차를 하고 있던 상황이었기에 누군가 다치거나 놀라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었다.


인생에도 되감기 기능이 있다면, 정말 아주 조금만 그 순간으로 돌아가서 지금 일어난 사고를 없던 일로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그러나 지난날 내가 피할 수 없었던 그 사고를 떠올리며 어찌할 수 없는 일들을 되돌리려 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고가 났음에도 불구하고, 누군가 다친 사람이 없음에 감사하는 것, 그리고 이런 상황을 통해서 내가 배운 것들에 감사할 뿐이다.


오늘 아침 눈뜬것에 감사하기를.

건강히 움직이는 나의 두 팔다리에 감사하기를.

어두운 밤에 내 몸을 맡겨 스스로 치유함에 감사하기를.

우주의 이치를 알아감에 감사하기를.

그 감사함으로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축기를.


나의 삶이 때로는 어찌할 수 없는 것들로 가득 차 있어 너무 고되고 힘들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해 낼 수 있는 용기와 그것들을 바라볼 수 있는 지혜를 가진 사람이 되기를 희망한다.












메인사진 출처: 핀터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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