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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자씨 Jun 16. 2024

세상을 오해하기보다 이해하기를

틀린 게 아니라 다른 거야.





하교시간 아이를 기다리며 교문 앞에 서있었다. 햇살이 뜨거워 그늘로 몸을 숨겼다. 머리 위로 가느다랗고 노랗게 변한 솔잎이 툭툭 떨어졌다. 갑자기 불어오는 바람에 우수수 솔잎이 떨어졌다. 시든 잎이 떨어져야 새잎이 돋아난다는 것을 알지만, 떨어지는 잎들을 보고 있자니 아쉽게만 느껴졌다. 마르고 시든 잎이 흔들리는 바람에도 나뭇가지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애써 붙어있는 모양새가 안쓰럽게 느껴졌다. 바닥에 떨어진 노랗고 가느다란 솔잎들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너희들은 어디로 가니?'


아마도 바람에 흩날려 다시 땅으로 돌아가 썩은 뒤 새로운 생명을 틔우는 거름이 되겠지. 다만 너와 나의 시간이 다를 뿐, 나 또한 언젠가는 흔들리는 바람에 툭 하고 떨어져 다시 땅으로 돌아가 새로운 생명의 밑거름이 되겠지. 그것이 우주의 이치이자 자연스러운 일이겠지. 떨어진 솔잎들을 보며 안타까움이 든 이유는 나 또한 그렇게 될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을까?


바람이 불면 바람에 몸을 맡기고 흔들리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라 생각했다. 거친 파도에 맞서 싸우려 하기보다 파도의 일렁임에 몸을 맡기는 게 멀미를 덜 하는 방법이라 생각했다.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에 대해 유연하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이 내가 가진 가장 큰 장점이자 그것이 옳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그러나 이 또한 한쪽으로의 지나친 치우침이 아닐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단단한 사람이 되고 싶다. 어떤 외부의 공격이나 상황들 속에서도 '그러려니' 하고 넘길 수 있는 사람. 진정한 단단함은 유연함을 바탕으로 나 이외의 모든 관계나 상황들이 다를 수 있다고 세상을 이해한다. 반면 나는 스펀지 같은 사람이다. 주변의 모든 분위기와 감정들을 흡수하는 사람. 특히나 가까운 관계 속에서의 나는 더욱더 스펀지처럼 모든 것들을 흡수하려 한다. 겉으로는 유연한 사고를 하면서도 내면 깊숙이 나 이외의 모든 관계나 상황들이 나와 다르다고 느낄 때 커다란 불안과 함께 세상을 오해한다. 나만의 방식으로 왜곡해서 바라보고 이따금 뾰족한 가시들을 내세워 나를 보호한다.



아이는 가정의 모든 문제를 흡수하는 스펀지와도 같다. 싱크대나 세면대의 U자관처럼 구부러진 밑바닥에는 말 못 할 두려움이 잔뜩 고여있고, 바짝 마른 스펀지 안에는 언젠가 번져 나올지 모르는 진한 불안이 숨겨져 있다.

- 천수영의 <공감육아>중에서-




내 마음속 깊은 곳에는 나조차도 쉽게 들어갈 수 없는 비밀의 방이 존재한다. 온갖 두려움과 불안 억눌린 감정들을 숨겨놓은 곳이다. 언제 문이 열려서 이 불안과 억눌린 감정들이 모두 쏟아져 나올지 나도 모른다. 다만 지금의 나는 이 방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지했다는 것이다.



 "안전감"을 느끼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은 함께 지하실에 들어갈 수 있는 믿을만한 사람을 만나는 것이다.

누군가 나를 충분히 '이해'(Understand)하게 되려면 나의 깊은 비밀의 방, 우리의 내면 속 맨 아래(under)까지 내려가서 함께 서 있는(stand) 경험을 해야 한다고 한다. 그것이 바로 Understanding의 어원이다. 여기서 '이해'는 '공감'과 상통하는 개념이다.

'공감(Empathy)의 어원적 의미는 '고통 안으로(into suffering)이라는 뜻이라 한다. 비슷한 단어인 동정심(sympathy)과 비교해 볼 때, 공감은 함께(sym-) 보다 안으로(em-)의 의미를 강조한다는 차이가 있다.


-천수영의 <공감육아>중에서-




동정심과 공감의 차이를 예로 들어보면, 한 사람이 길을 가다 웅덩이에 빠졌을 때 손을 내밀어 구하는 마음은 '동정심'이라고 한다. 반면, 웅덩이 안으로 내려가 그 바닥부터 웅덩이에 빠진 이를 적극적으로 밀어 올리는 감정이입을 '공감'이라고 한다.









어렸을 때의 기억이 아주 많지는 않다. 다만 몇몇 강렬한 장면들이 충격처럼 나의 뇌리에 깊숙이 박혀 있을 뿐이다. 아빠가 식칼을 들고 엄마의 머리채를 잡은 채 위협하는 장면,  아빠에게 구타당하는 엄마의 비명소리를 들으며 방 안에서 한없이 울었던 기억들. 온몸과 얼굴에 멍이 든 채 방에 누워있는 엄마의 모습. 그 순간들로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지만 이 시간들을 흘려보내주기 위해서는 과거의 나와 마주하는 용기를 내어야 했다. 어리고 무력했던 나를 공감해 주고 애해 해주어야 했다. 어린 시절의 나에게 물었다.


"많이 불안하고 무서웠지?"


"응...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이 너무 무섭고 불안했어. 차라리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면 좋지 않았을까."


"참 많이 불안하고 무서웠겠다..."


방문고리를 잡고 엄마의 비명소리와 울음소리를 듣고 무서움과 두려움에 몸서리쳤던 어린 시절의 나를 꼭 안아 주었다.


"괜찮아... 이제 괜찮아... "


한참을 울고 나니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누군가는 말한다. 뭣하러 힘들고 불안했던 과거를 그렇게 붙잡고 늘어지냐고. 그냥 잊어버리고 생각하지 않으면 되지 않느냐고. 그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한 적이 있다. 차라리 기억을 잊어버린 사람처럼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한다면 조금은 편안해지지 않을까 싶었다. 그러나 외면하거나 회피한다고 해서 스펀지속 흡수되어 있던 불안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외면하거나 회피한 생각들은 불현듯 일상 속에서 불쑥불쑥 튀어나온다. 예를 들어 언성이 높아지거나 싸움을 할 것 같은 분위기가 형성될 때, 누군가에게 맞아서 아파하는 사람을 볼 때 등 내가 겪었던 상황과 비슷한 상황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 상처들은 숨어있다가 불쑥불쑥 불안이라는 얼굴을 하고 튀어나온다. 스펀지의 물기를 짜주고 햇빛에 말려주려면, 물을 짜는 행위, 햇빛을 마주할 용기를 가져야 한다. 그 시절의 나와 마주하고 공감해 주고 이해할 때 비로소 과거를 과거로써 흘려보낼 수 있는 것이다. 과거의 불행했던 험과 기억을 바탕으로 지금의 행복을 망치지 않을 수 있는 힘을 기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얼마 전 성시경 님의 유튜브 채널 <먹을 텐데> 오사카 편에서 마츠다상과 성시경 님의 대화가 인상 깊었다.


5개 국어가 넘는 외국어로 유창하게 대화할 수 있었던 슈렉처럼 생긴 성시경 님의 대학 후배에 관한 일화를 이야기해 주었다. 후배는 남자여자한테 모두 최고의 인기남이었다고. 우리는 사회나 인간관계가 규정한 편견으로 인해 스스로를 인정하고 사랑하는 데 있어서 커다란 영향을 받는다. 외모, 학력, 재력등의 겉모습만 가지고 판단하는 편견을 버리지 않으면 결국 그 잣대들을 스스로에게 가져와 자신을 비관하고 채찍질하며 스스로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게 된다.


다른 나라의 언어를 구사할 수 있다는 것 자체 만으로도 나와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유창함 정도를 떠나 그 나라의 문화와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 자체가 결국 나를 사랑하고 나와 너의 다름을 인정하게 되는 과정이 아닐까 한다. 성시경 님의 후배분도 본인 스스로 슈렉을 닮은 외모라는 프레임에 갇히지 않고 다양성을 인정하고 다른 문화를 받아들임으로써 그 매력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발산된 것이 아니었을까.

그렇게 다양함을 인정하고 나와 다름을 인정하면 세상을 "오해"하기보다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 같다. 더 나아가 나 자신을 이해하며 사랑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는 것이 아닐까.







떨어지는 솔잎이 안타깝다 말하며 솔잎에 감정이입을 하는 나는 감성적인 사람이다. 그런 나를 인정하려 한다.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잣대와 기준으로 나를 판단하려 하지 않으려 한다. 나의 과거 속 상처들도 나의 일부임을 받아들이고 마주하고 흘려보내주며 유연해지려 한다. 진정한 단단함은 유연한 사고에서부터 흘러나온다는 것을 깨닫고 유연한 사고를 가진 나를 사랑하려 한다. 그 사랑으로 공감하며 세상을 오해하기보다 이해하기를 바라본다.











메인사진출처:핀터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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