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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옙스키와 나 -2

나란 누구인가?

by Younggi Seo

지금 이 글을 보는 독자 분은 어떤 경로로 들어왔던지, 정말 행운이라고 말해드리고 싶다. 왜냐하면 내가 도스토옙스키라는 문호를 알고 나서, 정말 '이 사람이야말로 사람이구나'를 느낀 것처럼 그의 비평을 읽노라면 독자로 하여금 뒤통수를 맞는 느낌의 어떠한 계기를 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도스토옙스키를 차츰 알아가기 전에 나의 심연에서는 그가 나에게 전하는 메시지의 일부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이를테면, 이 글을 쓰기 한참 전의 수기 중에 '삼류 싸구려 소설'이라는 부제로 인간 욕망의 역전(Inversion)에 대한 예고편의 글을 긁적거리기도 한 거처럼 말이다. 도스토옙스키는 소설가라기보다는 철학자 광인, 니체가 말했듯이 심리학자에 더욱 가깝고 현대의 심리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도, 물리학자인 아인슈타인도 도스토옙스키가 독일인(니체, 아인슈타인 모두 독일 태생, 단 프로이트는 오스트리아임.)을 욕한 러시아인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치적을 찬양했다. 왜?



본인이 그에게 가진 관심은 4차 산업 혁명 시대에 필요한 철학이라기보다는 현대인들이 지금처럼 말로만 떠드는 ‘급하게 바뀌는 세상과 사회에서라도’ 조금은 덜 떨어지지 않게 어떤 지적 태도로 맞서야 하는지에 있었다. 초기에는 '에이트'의 작가 이지성 씨가 말한 대로 철학과 문학이라는 매개를 통해 앞으로 백 년 정도를 더 산다면 어떻게 이 백 년의 시기를 버틸 건지에 대한 사색이 출발점이었다. 구체적으로 본인이 한 30년 정도의 먹고살 수 있는 직업의 돌파구를 찾는 게 목표였다. 하지만 그에 대한 주변부의 평가, 특히 E. H. Carr의 '도스토예프스끼 평전'이라는 책을 읽음으로써 더욱 관심 가져지게 된 것은 먹고사는데 당면할 문제가 아니라 바로 "나란 무엇인가?"였다(질문이 왜 누구인가가 아니고, '무엇인가'인지는 챕터 #7에서 알 수 있다).



다른 이의 삶을 통해 투영된 나라는 한 개체의 본질을 찾아가는 것이고 그리고 이러한 과정과 앞으로 계속 이어질 편에서 왜 미래를 예측하고 또한 대한민국 학교라는 플랫폼은 사라져야 한다는 당위성이 의미가 있는지에 대해 이 책의 6장 이후부터 이야기하고자 한다.



한편 작가 이지성 씨는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고 있는 거 같은 해당 대중 서적을 출판해서 대한민국의 보통 대중들의 시선에 주목받았다.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을 읽고 우리는 예기치 못한 자율주행차 사고*의 우선순위에 대한 선택을 고민해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이와 같은 판단 내리기 어려운 윤리적 딜레마 혹은 도덕적 문제에 대해서 인간만이 선택할 수 있다고 그가 말한다. 이를 준비할 수 있는 자만이 산업혁명 시대에 인공지능이 하지 못하는 유일한 무엇이다라고 말이다. 하지만,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이든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든 ‘악령’이든 그의 고전들에서 말하고자 하는 인간의 심리는 “악을 통해서도 선과 같은 도덕률을 발견할 수 있다.”이다. 인간만이 판단 내릴 수 있는 이분법적인 윤리관이 자연의 세계에서는 가차 없이 매몰되어버린다. 그리고 자연의 세계와 동일한 4차 산업혁명의 가장 큰 화두인 인공지능을 조종하는 알고리즘*의 세계에서는 도덕적 판단에 대한 기준은 사라진다.



수순히 알고리즘의 규칙과 순서만을 따르는 AI가 미래에서는 변호사, 판사 심지어 예술가조차도 대체할 수 있을 거라고 지금의 미래학자들이 내다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AI가 결코 대체하기에는 모호한 인간 심연의 도덕 감정에 의해 내려지는 판단에 대해서는 인간이 직접 결정해야 한다. 단편적인 예로써 방금 든 자율주행차든 기계가 한정된 경우의 수의 경로를 향해 돌진하고 있다면, 죽는 사람 수나 나이에 따라서 충돌 경로를 선택할 게 아니라, 자동 제동장치가 작동하여 순간적으로 급제동이 되도록 설계해야 한다. AI의 알고리즘이 순간의 0.01초를 내다보기 힘들다면 급제동이라도 하게끔 인간이 미리 비상 탈출구를 마련해두어야 한다 말이다.



어떠한 경우의 수라도 미래는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미래를 예측하지 못하는 이유는 수없이 많은 원인과 요소들 때문이 아니라 과거가 현재를 완벽히 재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게리, 2002). 그래서 AI라고 하더라도 모든 경우의 수나 패턴을 미리 학습할 수는 없다. 선택의 문제는 어느 한쪽으로도 기울어지게 되고, '현재성'은 중요한 문제가 된다. 사건을 이해하기 위해서 '또 다른 무언가'가 일어날 수도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일단 나온 결과에 대해서는 뒤돌아 보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불가피했다는 생각도 하지 말아야 한다.



나는 강렬한 순간에 완전히 몰입시켜야 한다. 당신이 그곳에 있어야 한다.





* http://www.ciokorea.com/news/37749



Reference

Leatherbarrow, W. J. (2002). 케임브리지 대학 추천 도서 : 도스토옙스키 (원제 : The Cambridge companion to Dostoevskii.) Cambridge: 우물이 있는 집(Cambridge University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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