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릴래아 사람들아, 왜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느냐?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을 우리들의 입장이 아니라 하느님의 입장에서 생각해 본다면, 과연 어떤 사건이었을까요? 도대체 무슨 생각에서 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셨을까요?
나라에도, 회사에도, 가정에도 비상사태라는 것이 있습니다. 비상사태는 지금 하던 대로 하면 돌이킬 수 없는 문제가 발생하거나, 갑작스럽게 발생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때를 이야기합니다. 우리나라를 생각해 본다면, 6.25 전쟁이 그랬을 것이고, 금융위기가 그랬을 것입니다. 어쩌면 지금 많이 언급되는 인구감소 문제도 비상사태일 수도 있겠습니다. 이 모든 것은 그때 당시나 지금 하고 있는 방식에서 조금 열심히 한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새마을운동과 경제개발계획을 통해서 6.25의 막대한 피해를 극복할 수 있었고, 금 모으기를 시작으로 나라와 기업과 개인이 허리띠를 졸라맨 덕분에 금융위기도 극복하였습니다. 가정에서도 누군가 갑자기 아프거나, 준비가 안되었는데 실직을 하거나 하면 일종의 비상사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도 아내가 심하게 아프면, 무엇을 해도 맘이 편하지 않고, 기존의 생활 방식을 바꿀 수밖에 없기도 합니다.
하느님이 보시기에 예수님을 보내시기 전 인간 세상이 바로 비상사태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갑자기 해봅니다. 어떤 예언자를 보내도, 어떤 시련을 주어도, 그저 잠시 고개를 돌아볼 뿐 진심으로 마음이 돌아오지 않는 세상을 보시면서 무언가 다른 방법을 쓰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으셨을까 상상해 봅니다. 홍수로 세상을 쓸어버리기도 하셨고, 소돔과 고모라를 불로 쓸어버리기도 하셨고, 이집트와 바빌론 밑에서 종살이를 하게도 하셨습니다. 그렇게 해도 어느 순간에는 하느님 곁에서 멀어져 있는 사람들을 보시고, 비상사태를 선포하셨을 것 같습니다. 하늘의 천사들을 모아 놓고,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물어봤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전지전능하신 분이 스스로 결정하셨겠지만 말입니다. 너무나 사랑하는 이 세상을 싹 없애버려야 하는 사태로 가게 그냥 둘 수는 없으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선택하신 마지막 수단이 외아들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시고, 수난받게 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하셨습니다. 이 세상의 죄를 모두 씻어줄 가장 강력한 수단을 사용하셨습니다. 그런데 죄를 용서해 주는 일은 이전에도 계속 있었던 일이었습니다. 인간들이 부르짖으면 언제나 벌을 거두시고, 다시 안아주셨던 하느님을 우리는 너무나 많이 구약에서 보아왔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죄로 인해 인간에게 주어진 죽음마저도 이겨내셨습니다. 하느님 안에서는 죽음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느님 안에만 머무르면 죄도 죽음도 우리를 해치지 못하도록 하셨습니다. 이렇게 세상에서 하실 모든 일을 마치시고, 다시 일상으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셨습니다. 비상사태가 끝이 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원래 자리이신 하느님의 오른편에 앉으셨습니다. 이제는 우리의 일상이 바뀌어야 합니다. 비상사태 속에서 일시적으로 문제 해결을 위해 했던 일들을 자연스럽게 일상으로 가져와야 합니다. 작은 것 하나도 옆에서 가르쳐주시고, 넘어지면 손을 내밀어주시고, 배고파하면 먹을 것을 주셨던 예수님은 원래 자리로 가셨습니다. 이제는 모르는 것이 있으면 성경을 찾아봐야 하고, 어려운 것이 있으면 서로가 서로에게 스승도 되어주고 어깨도 내어주어야 합니다. 사실 항상 어깨를 내어주고, 방향을 가리켜주는 이웃 덕분에 지금도 이 세상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하늘로 올라가신 예수님의 뒷모습을 멍하니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며, 그분이 가르쳐주신 그 길을 묵묵히 걸어갈 때입니다.
“갈릴래아 사람들아, 왜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느냐?” 사도 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