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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영미 Dec 31. 2020

일본어 전공자였지만, 지금은 한국어 번역 일을 합니다

대만의 종원용(鍾沅容) 이야기

대만 거주 시절, 명함에 쓰인 글자다.

W 대학교, 일본어학과, 趙英美


몇몇의 대만 사람들은 내 명함을 받으면 이렇게 말했다.

“곤니찌와, 하이, 하이”

또 몇 명은 이렇게 말했다.

“짜오잉메이(조영미의 중국어 버전), 한국 이름 같은데…”


나, 짜오잉메이는 대만에 와서 일본어를 가르치는 한국 사람이 되곤 했다.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정체성이 왜곡되는 상황은 해외에 가면 종종 맞닥뜨리기는 한다. 

오래 전 미국에서 만난 미국인들이 날더러, “중국 사람이에요?” (아니요), “그럼, 일본 사람이에요?” (아니요), “어느 나라 사람이에요?” (코리아) “북한 사람인가요?””라는 질문을 처음 들었을 때만큼이나 혼란스러웠다. 그로부터 이십 여 년이 지난 시간, 나는 아시아의 한 나라에서 내가 ‘대만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는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구구절절 설명해야 했다. 




내가 일했던 학교에는 한국어과가 없었다. 일본어과 소속으로 한국어 과정 및 부전공이 개설되어 있었다. 한국어 수업을 들으러 오는 학생들 중에는 일본어과 학생들이 많았고, “Japanese”라고 큰 글자가 쓰인 과티를 입고 오는 학생들도 적지 않았다. “무엇을 좋아해요?”라는 질문에 “일본을 좋아해요.”라고 답하거나 “방학에 뭐 했어요?” 라고 물으면, 일본에 여행 갔다왔다고 하거나 일본에서 인턴십을 했다고 한 학생들도 있었다. 


대만에서 나는, 일본인이 아니며, 일본어를 가르치는 사람도 아니라고 설명과 강조를 번갈아가며 하는 일 이외에도 학생들에게 “지금은 일본어 시간이 아닙니다”는 사실을 여러 차례 각인시켜야 했다. 모든 대답은 한국과 관련된 것이어야 한다는 ‘강요된 규칙’을 만든 적도 있었다. “나카무라 상이 교토에서 스시를 먹으면서 사쿠라를 봐요.”라는 문장을 쓴 학생이 있다면 그 옆에, “요시다 상(일본인들이 자주 범하는 조사 오류) 오사카에서 기무라타쿠야를 만납니다”라는 문장을 쓴 학생이 있을 수도 있었다. 일본에게 유독 우호적인 대만 남부 지역 출신자이자, 상당수가 일본어과 학생이라면 더 의식적인 자극이 필요했다. 


그런데 얼마 후, 그 반대의 경우도 보게 되었다.




종원용 鍾沅容

가오슝 출신이라는 이 학생을 한국어 초급반에서 처음 만났다. 동사의 어미 변화를 배우기 시작하는 단계였는데, 그녀는 수업 시간 내내 맨 앞자리에 앉아 수업 내용을 충실히 따라갔다. 수업 시간에 문장 쓰기를 시킨 뒤 학생들의 문장을 확인하러 돌아다니다가 그녀의 노트를 보았다.


 글씨체가 달랐다.

 <한국어 2>, 교실에 있는 학생들은 대부분 지난 학기 <한국어 1>을 들은 학생이다. 즉, 이들은 한국어를 배운 지 육 개월이 채 되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그들만의 글씨체가 있었다. 잘 쓰고 못 쓰고의 문제를 떠나 그들의 글자는 자음과 모음이 균형을 잃어 몹시 불안하게 백지 위를 날아다녔다.


원용 씨의 글씨는 한국어를 적어도 일 년 이상 배운 이의 모양을 하고 있었다. 자음과 모음의 비율이 적당했고, ‘ㅁ’이나 ‘ㄹ’의 흘림도 한자처럼 보이지 않았고 진짜 한국의 어른 글씨처럼 보였다. 뿐만 아니라 이해력도 빨랐다. 동사를 활용해 문장을 써 보라는 과제를 제시하면 다른 학생들이 두 문장 쓸 때, 그녀는 대여섯 문장을 썼다. 그녀의 문장력을 보면 “나는 식당에서 밥을 먹어요.”가 아닌, 그녀가 좋아하는 인피니트 멤버 성규와 전주에서 비빔밥을 함께 먹은 이야기를 써 줄 수도 있어 보였다(인피니트는 대만에서 큰 인기를 끌었는데, 멤버 성규의 고향이 전주라는 사실은 원용 씨가 내게 알려주었다). 


당시 그녀는 대학교 1학년에 재학 중이었는데, 그 정도 한국어 실력을 이미 갖추고 있었다면 학교에서 한국어를 배우기 이전에 분명 어딘가에서 배웠을 것이다. 어느 날, 나는 궁금증을 참지 못해 그녀를 불러 한국어를 어떻게 배웠는지를 물었다. 


그녀는 중학교 때부터 한국어에 관심이 있었던 터라 독학으로 한국어를 배웠고, 대학에 가서도 한국어 공부를 지속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W 대학에는 한국어과가 없었다. 그녀가 고민 끝에 내린 결정은 이랬다. 


한국어랑 일본어랑 비슷하니까 일본어과를 선택했어요.

사실, 이 이야기는 내가 W 대학에 근무하는 동안 학생들로부터 적지 않게 들어온 말이다. 일본어에 관심이 없었지만 한국어를 배울 수 있는 곳이 마땅하지 않아 일본어과에 적을 두고 학교에서 제공하는 한국어 수업을 듣는 것이다. 물론 이들의 한국어 능력은 일본어 능력보다 월등히 높았다. 


그녀는 <한국어 2>뿐만 아니라 또 다른 초급 단계인 <한국어 발음> 수업도 들었다. 이 역시 그녀에게는 너무 쉬운 과목이었다. 나는 또 그녀를 불러 왜 더 도전적인 과목을 듣지 않느냐고 물었다. 


학교에서 제공하는 한국어 수업은 모두 다 듣고 싶어서 신청했어요.

우선적으로 수강해야 하는 일본어 전공 필수 과목을 제외하고는 시간이 맞는 한국어 과목은 모두 수강한 것이다. 비록 그 과정이 쉽든 어렵든 그녀는 상관하지 않았다. 한국어를 배울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했다. 

그녀는 한국어 전공자가 될 수 없었지만, 한국어 수업을 몇 과목씩 듣고 혼자 공부해 가면서 전공자 못지 않는 한국어 실력을 쌓아갔다.


그녀는 침착했지만 절실했고, 조용했지만 열정적이었다. 나는 그녀가 정해진 시간에 한국어를 더 연습할 방법을 고민했다. 아무래도 수업을 더 듣는 일을 무리이니 수업 시간을 활용해야 했다. 

우선, 나는 그녀에게 해당 수업의 반장 일을 맡겼다. 원용 씨는 출석체크, 학생들 퀴즈 및 과제 정리를 비롯해 나와 학생들 간의 의사소통을 돕는 일을 해 주었다. 그녀는 내가 하는 말을 모두 알아들었고, 그것을 정확히 중국어로 표현할 줄 알았다. 그녀가 정식으로 한국어를 배운 지 일 년이 채 되지 않았을 때였다. 


[2016년 3월 10일] 오늘 수업이 너무 많아서 힘들어요. 그나저나 오늘 조금 추우니까 선생님이 감기 조심하세요. 고생하셨어요.


원용 씨가 내 수업 시간에 쓴 일기의 첫 문장이다.

그녀의 실력에 비해 수업이 쉬우니 과제 종이에 한두 문장을 더 쓰면 내가 체크해 주겠다고 했더니 그녀는 바로 이렇게 써서 제출했다. 이 문장은 원용 씨가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그녀가 아직도 자신의 ‘첫 한국어 일기’를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에 적잖이 놀랐다. 


그녀의 일기를 보니 나는 몇 해 전 그녀를 만났던 대만의 한 강의실이 떠올랐다. 교실은 더웠고, 에어컨은 돌아가지 않았고, “너무 덥네, 저기 창문 좀 열어 주세요. 저쪽도.” 라고 말해 놓고는 서둘러 교탁 옆 창문을 열다가, “이거 왜 안 열리지?”라며 중얼거렸다. 원용 씨는 내가 혼잣말처럼 스치듯 한 말과 행동에 곧바로 반응해 주었다. 뒷자리 학생들에게 창문을 열라고 전달했고, 내 옆 창문은 그녀가 손수 열어주었다. 그녀는 창문을 활짝 열고는 다시 제자리에 앉았다. 그리고는 나를 향해 수줍은 듯 활짝 웃어 보였다. 

한국어라면 누군가의 중얼거림도 놓치지 않는 그녀, 

이제는 타인의 중얼거림이 아닌, 그녀가 스스로 한국어로 자신을 표현할 기회를 주고 싶어 그녀에게 이렇게 제안했다. 


“일주일에 한 번 상담시간(office hour)에 와서 나랑 얘기하지 않을래요?”

그녀는 흔쾌히 그렇게 하겠다고 답했다.

그렇게 우리는 대화를 시작했다. 한국어로.




첫 상담 시간이었다. 

그녀는 지난 한 주간 있었던 일을 내게 말했다.

그녀와의 대화로 그녀가 쌍둥이고, 내가 종종 가는 지하철역 근처에 살고 있으며, 중학교 때 ‘미남이시네요’를 보고 한국 드라마와 한국어에 관심을 갖게 되었으며, 자신이 이렇게 한국어에 푹 빠져있다는 사실은 부모님이 잘 모르신다는 고백에, 자기 과에 몇 안 되는 남학생들이 ‘공개된 게이 커플’이라는 정보(?)도 알려 주었다. 


저의 당시 한국어 말하기 실력은 쉬운 대화만 하는 수준이었는데 선생님과 1대1로 대화하는 것은 정말 저를 숨을 못 쉬게 했습니다.


눈치 채지 못했는데 우리의 첫 대화에서 그녀는 너무 긴장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긴장은 서서히 누그러졌다. 한 동안 나는 상담시간에 원용 씨를 오게 했고 그녀는 천천히 그러나 아주 정확하게 한국어로 대화를 이어갔다. 조용한 그녀가 자기 생각을 천천히 이야기해가는 모습, 긴장한 듯 했지만 가끔씩 소리 내어 웃는 그녀가 참 예뻐 보였다고, 기억한다. 


한국에 교환학생으로 가고 싶어요.


당시 원용 씨의 그 꿈은 실현되기가 어려웠다. 

해외 교환학생 프로그램에 참석하려고 알아보았는데, 일본어과이니 일본의 자매 대학에서 공부하면 대부분 학점이 인정되는 교과목을 이수할 수 있었다. 한국 대학에 가게 일본 대학에서처럼 많은 교과목들을 듣고 학점으로 인정받을 수 없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에 교환학생을 가게 된다면 졸업을 유예하게 될 위험(?)이 있었던 것이다. 결국, 원용 씨는 제때 졸업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한국으로 교환학생을 가는 일을 포기했다. 그것은 그녀 부모님의 뜻이기도 했다. 


원용 씨는 이 결정을 내내 후회했다. 하지만 그 아쉬움은 오래 가지 않았다. 한국어와 접목할 수 있는 학문에 대해 알아봤고, 오랜 고심 끝에 그녀는 대학 2년을 마친 뒤 타이베이상업대학교(Taipei University of Business)로 편입해 경영학을 전공하게 되었다. 마침 그 대학에도 한국 자매 대학이 있어 알아보니, 교환학생으로 한국에 다녀와도 학점 이수에 큰 문제가 없자 한국 교환학생으로 지원했고 결국 선발되어 자신의 제1지망인 대구 경북대학교에서 한 학기 동안 공부할 수 있었다. 


2019년 여름, 대학을 졸업한 후에도 한국에서 더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은 간절했고, 대만 교육부가 제공하는 ‘赴韓研修韓語文交換獎學金(한국내 어학연수 장학금)’이라는 장학 프로그램에 지원해 1등으로 합격했다.


서울대학교 언어교육원에서 우등상을 받은 종원용 씨


경북대학교에서 한 학기, 서울대학교에서 한 학기 동안 공부할 수 있게 되었다. W 대학에 재학 중일 때 놓친 한국 유학 기회를 이렇게 연달아 얻게 된 것이다.



서울대 언어교육원에서, 종원용


2020년 5월.

타이베이에 있는 대만 섬유 무역 회사에 취업했다. 그 회사는 한국 원단을 수입해 대만 내 바이어나 해외 바이어들에게 판매하는 곳인데, 원용 씨의 업무는 한국 섬유 공장에 원단에 대해 문의하거나, 아이템 요청 및 아이템의 수출입과 운송을 원활히 진행하기 진행하기 위해 공장과 소통하는 업무를 맡고 있다. 또, 다른 일도 하고 있는데, 한국 시장 진출을 계획하는 대만 정수기 회사의 마케팅 정보 수집, 공식 사이트 및 SNS 게시글, 판매 상품 설명서, 고객 문의 답변, 등을 한국어로 번역하고 있으며, 한국 네이버 블로거와 협찬 상의 업무도 맡고 있다. 

원용 씨는 대만 기업이 한국 기업 및 고객들과 원활하게 소통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맡고 있으며, 그녀의 바램 대로 한국어를 사용하는 업무를 담당하게 된 것이다. 


한국어 책을 번역하는 전문 번역가로 일하고 싶어요.


번역 업무를 지속적으로 하고, 한국 책도 자주 접하게 되다 보니 한국의 좋은 책을 대만에 소개하는 전문 번역인이 되고 싶다고 했다. 


그녀의 글솜씨라면 꼭 해낼 수 있으리라 믿는다.

혹시 누가 아는가?

내가 낸 책을 원용 씨가 번역해 대만 현지 서점에 꽂히게 되는 날이 올지.

나는 그 날이 머지않아 올 것이라 상상해 본다.


초급 한국어 반에서 만난 학생과 동료로 함께 일하게 되는 날,

나도 그녀도 오래 간직했던 꿈을 이룬 날이 되겠지.


원용 씨가 이 자리를 빌어 하고 꼭 하고 싶어하는 말을 전해 본다. 


과거의 저가 그러하였듯 저는 여전히 한국어를 사랑하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 한국어를 중심으로 살고 싶습니다. 저에게 한국어는 무엇을 하기 위해 혹은 무엇이 되기 위해 배워야 하는 도구가 아닌 오히려 잘 배우면 무엇을 할 수 있게 되고, 무엇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시각을 넓혀 저를 더 탄탄하게 만들 수 있는 재능이면서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한국어가 축복이라고 말하는 그녀가 더 큰 꿈을 이루기를 바란다.

그것이 나와 그녀의 새해 소망이기도 하다.



* 사진은 모두 종원용 본인이 제공했으며, 대문 사진은 원용 씨가 제일 좋아하는 책의 문구입니다.

** 본 글은 종원용 본인의 확인 절차를 거쳤습니다.


2020년 마지막 날에 쓰는 글이네요.

올 한 해 브런치를 통해 많은 분들과 소통하며 성장할 수 있었어요.

제 글을 읽어 주시고, 또 깊이 있는 글로 저를 일깨워주신 분들께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새해에도 함께 열심히 써 봐요~



대만의 한국어 교육 이야기: 이전 관련 포스팅 참고


https://brunch.co.kr/@youngmicholaf5/52


 https://brunch.co.kr/@youngmicholaf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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