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갑자기 시작된 건 아닐지도 모르겠다. 10월에도, 11월에도 우리 진진이는 도움의 손길을 요청하고 있었을지도. 그저 말랐다 정도의 눈바디에서 극심한 저체중으로 떨어진 게 순식간이었고, 그 와중에 변하는 아이의 심리상태에 대응할 방법을 나 같은 무지한 엄마는 알 수 없었다. 치료 방법을 모르기 때문에 미지의 병은 무섭다. 어느 병원으로 가야 할지, 예상되는 치료 과정이 어떨지, 쉽게 찾을 수 있는 정보가 없어서 정말 어려웠다. 관련된 책을 사서 미친 듯이 읽고 경험담을 습득했다. 내가 얻은 정보로 낸 결론은, 이 병은 지독하고 또 지독해서 자꾸만 아이를 파멸의 길로 유혹할 것이란 것. 어서 아이와 병을 분리해 내 병을 함께 이겨내도록 도와야 한다는 것. 그제야 나는 '우리 아이에게 왜 이런 병이?'라는 질문을 멈출 수 있었다.
다행히 맞는 병원을 찾았고, 나와 남편은 전문가에게 우리 딸을 100% 맡기기로 했다. 병원을 처음 찾았을 때, 왜 이제 왔냐는 듯한 의사 선생님의 시선은 참아낼 수밖에 없었다. 진진이는 직전 2주는 거의 고형물은 먹지 않은 듯했는데, 그 지경이 될 때까지 몰랐다는 사실이 엄마인 나를 괴롭게 했다. 병원에 가는 걸 거부할 줄 알았으나, 진진이도 본인이 도움이 필요한 상태까지 온 것을 알고 있었다. 매주 병원에 가서 아이의 상태를 확인하고 상담센터에 가서 식단을 정하는 동시에 심리상담도 시작했다. 치료 초반, 진진이는 다시 신생아 시기로 돌아왔다. 요즘 흔히들 말하는 '키 빼기 몸무게'가 130 가까이 되었으니, 걸어 다니는 것이 불편할 정도의 몸 상태이기도 했고, 병원 치료와 상담을 시작하면서 앞으로 본인에게 닥칠 변화에 불안감이 높아 전적으로 나에게 의지하고 있었다. 매주 식단을 조금씩 늘려 나갔으나, 아예 안 먹던 아이가 조금씩 먹기 시작한다고 체중이 급격히 늘지는 않았다.
경구영양제와 더불어 진진이가 선생님과 정한 하루 세 번의 식단은 아래와 같다.
- 아침: 곡물빵 잼 계란프라이
- 점심: 죽 250그램
- 저녁: 빵 잼 계란프라이 두유
거의 안 먹다시피 한 진진이에게 고형물 위주의 식단은 너무나 큰 도전이었다. 정말 기적적으로 아이는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줄어든 위 때문에 적은 양의 음식도 부담이 되어 계속 배가 아프다 했으나 최대한 자주, 조금씩 먹게 했다. 매주 1킬로 미만으로 체중이 늘다가, 어느 순간은 감량이 되기도 했다. 치료 1개월이 접어드니, 한주에 1킬로 정도 체중이 늘고 있었다.
급격한 체중 감소가 위험한 이유가, 몸의 지방과 근육이 빠져나가다가, 결국 심장과 뇌의 근육마저 손상시키기 때문이라고 한다. 진진이는 기존 체중에서 20% 이상 단기간 감량되었으므로, 장기뿐 아니라 뇌도 건강하지 못한 상태였다. 눈빛이 희미하고 반응이 느려서, 나는 밤에도 낮에도 아이를 관찰했다. '조금만 더 늦게 병원을 찾았더라면 내 고운 아이를 어느 순간 잃을 수도 있었겠구나' 하는 오싹한 생각들이 수시로 나를 덮쳤다.
인간의 기본 욕구 중 하나인 식욕이 사라진다는 것은 엄청난 정신적 이상이다. 진진이는 사라져 버린 식욕에 맞서, 정해진 식단을 지키기 위해 매 순간 노력하고 있었다. 다른 아이들은 중학교 입학을 앞두고 공부하느라 여념이 없었지만, 우리 딸에게 공부는 사치로 느껴졌다. 이 비정상적인 상황이 끝나긴 할까. 수시로 두려움이 몰려왔지만, 아픈 아이를 최대한 회복시켜 입학시키리란 목표에만 집중하며 시리도록 추운 겨울을 뜨겁게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