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춘기 시절의 영심이는
#7
중학교 때 잠깐이지만 호되게 왕따를 당했었다. 얼마 후 다시 아이들이 놀아준다고 했지만 그 이후에 나의 모든 감각은 따돌림을 당해서는 안된다는 것에 맞춰져 있었고 이후에 중학교 생활은 사실 기억이 잘 안난다. 그 당시 왕따가 유행(?)이었다. 나 뿐 아니라 많은 아이들이 별 거 아닌 이유로 왕따를 당했었다. 내 기억으로는 왕따를 주동하던 한 아이가 있었다. 내가 따돌림을 당하지 않으려면 누군가를 따돌려야 하는 상황에 놓인 나는 비겁함을 선택했었던 것 같다.
그 때 한 친구가 나랑 몰래 놀아줬었던 기억이 난다. 자기는 나랑 놀고 싶다며 문자도 보내고 세이클럽으로 대화도 매일 했었던 것 같다. 한 날은 그 아이가 쉬는 시간에 매점에 가자고 했다. 수치스럽게도 나는 가난하기까지 했기 때문에 돈이 없었다. 나하고 몰래 놀아주는 친구에게 과자를 사주지는 못 할 망정 얻어먹게 된 것이다. 더한 것은 매점에서 다른 아이들에게 들켜서 그 친구가 핀잔을 들었는데, 그것을 보고 나는 황급히 그 자리를 피해 교실로 돌아갔다. 그 때 걔가 나한테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나처럼 비겁하지는 않았던 거 같다. 어쩌면 왕따를 당했던 것 보다 비겁했다는 그 수치심이 아직 나를 괴롭히는 지도 모르겠다.
그 후 여자들 무리에 질려버린 한동안은 눈치만 보는 생활을 했고, 그 후에는 부작용으로 쿨병에 걸려서 혼자 허세 떨면서 은따를 자처했다. 겉으로는 쿨해보이지만 속으로는 외로워 어쩔 줄 모르는 아이로 살기로 결심했다. 그 때부터 그 ‘세보이는’가면을 쓰고, 쓴 지도 모른 채 어른이 되었다.
# 8
중고등학교 때 내 유일한 피난처는 다니고 있던 미술학원 이었는데 어쩐지 나를 알아주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거기는 따돌림을 당할까봐 두려워할 또래도 없었고 교육엔 관심도 없으면서 명령만 해대는 선생님도 없었다. 중학교 때 어떤 화실에서 신나게 그림을 배우다가 고3인 작은언니가 급격히 진로를 바꿔 작곡 레슨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 생겼다. 엄마가 나에게 잠시 미술학원을 쉬어야 한다고 했을 때, 나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지만 내 마음은 다시 방황하기 시작했다.
학교 친구들은 모르겠지만 그 때 중학교에서 자기들끼리 무리지어 놀던 몇 몇 아이들과 어울렸는데 그 아이들은 부모의 방해(?)를 받지 않고 자기들끼리 살거나 자유롭게 살아가는 레지스탕스같은 친구들이었다. 뭔지 모르겠지만 학교 선생님들은 상상할 수 없었을 모습으로 그 아이들과 어울려 놀았다. 하지만 나는 엄마가 무서웠고 돈도 없었기 때문에 마음껏 비행을 즐기지는 못했다. 그러다 교회 언니의 소개로 미술학원 다니는 오빠를 알게 되었고 내가 듣는 음악을 듣고, 내가 보는 영화를 보던 그 오빠를 따라 미술학원에 다니기 위해 엄마에게 떼를 썼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게 시작한 입시 미술 덕에 내 사춘기가 그나마 봐줄 만했던 것 같다. 그야말로 피난처 같았던 화실같은 아담한 학원에서 나는 실력으로 나름 선생님의 인정을 받고 있었다. 선생님은 가끔 술도 사주고(엄마 눈감아) 맛있는 것도 많이 사주셨고 욕도 시원하게 해줘서 마음이 편했다. 그리고 그곳에는 나같은 이상한 언니 오빠들이 많았다. 비슷한 종족을 만나 그 무리에 들어가 안도감 비슷한 것을 느꼈던 것 같다. 나 말고도 있다. 이상한 사람들. 근데 나보다 심하게 더 이상했던 그 오빠는 늘 학원 여후배 들의 놀림거리가 되었었다.
#9
그림이 나를 대학이라는 곳에 들어가게 해주었다. 사실 이건 내가 대학에 붙었다는 소식을 알리자 엄마 보여주었던 충격적인 반응에서 나온 말이다. 나는 인서울을 목표로 열심히 그림을 그렸건만, 수시로 여기저기 떨어지고 정시에 대구의 한 4년제에 합격했다. 나름 무안한 마음으로 엄마에게 합격 소식을 알렸는데 엄마는 내가 대학을 갈 수 없을 것이라 내심 예상을 하고 있었으며 나름 지방에서는 유명한 대학에 내가 합격 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어했다. 그제서야 네가 그림을 잘 그리긴 하는 구나! 라는 소리를 들었던 것 같다. 그렇지만 엄마의 반응이 섭섭하지는 않았다. 내 목표에는 못 미쳤지만 이런 일로 엄마를 기쁘게 해줬다는 것이 못내 자랑스러웠다.
서울은 아니었지만 집에서 떨어져 대학이라는 곳에 간다는 것은 나에게 너무나 큰 해방감을 주었다. 대학에 들어감과 동시에 기숙사에 살게 되면서 가장 좋았던 것은 조용한 아침을 맞는 것이었다. 내 핸드폰 알림 외에는 깨우는 사람도, 화를 내는 사람도 없었다. 나는 자유를 느꼈지만 자유는 이내 다시 감옥이 되어 나를 옥죄었다. 진짜 자유가 주어지자 나는 어쩔 바를 몰랐다. 누군가 나를 붙잡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하나 하나 알려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모태 신앙이었고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교회에서 신앙 생활을 했다. 대학 입학과 함께 갑자기 불타오른 신앙심으로 인해 신입생 환영회 때는 술을 먹지 않겠다고 해 앞에 나가 노래를 불렀고, 고속버스를 타고 주중에 기도회를 하러 교회에 나갔다. 내 인생에서 가장 종교적 열심이 충만했을 때이고 많은 것을 배웠고 내 신앙의 초석이 된 경험들이 있었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참 오만했고 무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