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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치매 엄마와 말기암을 투병하는 남동생 돌봄일지

#15. 딸, 엄마의 등을 보다

by 햇살통통

–서울에서 내려온 딸과의 짧은 만남, 인생의 겹치는 무늬


치매 엄마와 말기암 동생을 돌보는 나날.

그 고단한 흐름 속에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엄마, 나 부산 내려왔어요. 친구들이랑 여행 중이에요.”

잠시 가슴이 뛰었다.

반가움과 설렘이 동시에 밀려오며, 무거웠던 하루가 순간 가벼워졌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딸이랑 밀면과 만두를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가벼운 농담도 오가고,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웃는 순간이 얼마나 오랜만이었는지.

서울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다가오자,

우리는 아쉬운 인사를 나누었고

그 짧은 점심시간이 내 마음 한 켠을 오래도록 데워주었다.


딸은 이제 사회인이 되어

스스로의 삶을 일구는 어른이 되었다.

어릴 적, 내가 바쁘게 일하느라 자주 곁을 지켜주지 못했지만

그 속에서도 단단하게 자라준 딸.

그리고 지금은, 나의 무거운 삶을 헤아릴 줄 아는 다정한 딸이 되었다.


요즘 나는 치매 엄마와 암 투병 중인 동생 사이를 오가며

몸도 마음도 자꾸만 닳아가는 느낌이다.

그런 내 사정을 다 알고 있는 딸은

짧은 만남을 위해 작은 선물도 준비했고,

내게 밥을 사주고, 할머니의 안부도 묻고

말보다 더 깊은 위로를 전해주고 갔다.

그 마음이 참 고맙고 뭉클했다.


하지만 문득 돌아서고 나니 마음 한편이 무거웠다.

나 하나 건사하기도 버거운 삶 속에서

정작 딸아이의 삶엔 내가 거의 부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울에서 묵묵히 일상을 버티고 있는 남편 또한

한참 동안 내가 제대로 챙기지 못한 또 다른 가족이다.


사람의 인생에는

어느 시기든 완벽한 균형이란 없다는 걸 안다.

누군가를 깊이 돌본다는 건

다른 누군가에게는 미안함을 남기는 일이기도 하다.

그래서 내 삶은 언제나 한쪽이 기울어 있다.



하지만,

그날 딸의 스쳐 지나간 짧은 햇살 같은 시간이

다시 내 삶을 환하게 비춰주었다.

잠시였지만, 그 순간만큼은 ‘내가 돌봄을 받는 사람’이었다.

엄마의 등을 지키며 살고 있는 내 등이

누군가에게는 또 기댈 수 있는 등이 될 수 있다는 걸

딸의 눈빛을 통해 알게 되었다.


언젠가 딸도 누군가의 등을 지키는 날이 오겠지.

그때 나는, 오늘의 이 장면을 기억해주고 싶다.

무거운 삶 속에도 따뜻한 순간은 찾아온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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