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행정의 중심지라고도 할 수 있는, 하바롭스크 지역 주도인 하바롭스크(Хабаровск)시다.
러시아가 극동 진출에 한창 열을 올리던 1858년 하바롭스크는 군사 전초 기지로 만들어졌고 1893년 러시아 탐험가 하바로프의 이름을 따서 개칭되었다 한다. 내륙에 위치해 바다와 인접하진 않지만 몽골, 중국을 지나 오호츠크해로 흘러나가는 아무르강이 관통한다. 시베리아 횡단열차가 드나드는 하나의 큰 관문이기도 하다.
극동지역에 있는 러시아 도시이니 블라디보스토크와 별 차이 없을거라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
하바롭스크는 철저히 계획된 도시라 혼란의 블라디보스토크에 비할 바가 못 된다. 그냥 느낌으로만 따진다면 일본같은 정갈함이 있는 도시라고 할까. 도시 전체가 바둑판처럼 짜여있어 어디를 가도 찾아가기가 쉽다. 길을 잃더라도 돌아갈 관성이 생긴다.
블라디보스토크는 말썽꾸러기인 반면 하바롭스크는 모범생에 비유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무르강을 마주보고 있는 우스펜스키 성당. 하바롭스크의 명소이다.
# 그 도시가 궁금해
보통 블라디보스토크 여행객들도 하루 관광코스로 잡고 하바롭스크를 왔다가는 경우가 많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비행기로는 한 시간 반, 기차로는 밤기차로 가면 아침에 도착하니 하루정도 스윽 돌아보고 가면 딱이다. 볼 것이 많다기보다는 그냥 깔끔하면서 담백한 소도시의 느낌을 체험하고 가는 것이다. 지나치게 높은 기대치도 필요 없다. 물론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다가 하바롭스크를 간 사람이라면 상대적 효과를 조금은 볼 수도 있겠다.
아무르강으로 내려가는 길
하바롭스크는 내륙에 위치해 날씨가 여름은 덥고 겨울은 춥다. 러시아가 사시사철 춥다는 편견은 그만.
겨울은 물론 춥지만 여름은 생각보다 덥다. 다행히 우리나라와 같은 더위와는 좀 다르다. 대신 햇살이 불탈 것 같이 따갑다. 한창 더울 때의 체감은 30도 안팎이다.
하바롭스크 광장에서 본 풍경
그리고 강이 흐른다.
이름도 어여쁜 아무르(Амур)강!
하바롭스크 주민들에게 매우 좋은 안식처를 제공해주지만 이 강은 맑고 푸르다기보단 하천같이 탁한 색을 띤다. 덕분에 벌레들도 많이 속출한다. 예쁜 이름 값은 못하는 것 같지만 이 도시의 젖줄이나 마찬가지다.
# 아무르강을 따라 산책
블라디보스토크에 있을 때는 산책할 곳들이 많지 않았다. 오히려 길을 걸어가다가 인도가 사라져 당황할 때가 많았다. 하지만 하바롭스크는 산책을 좋아하는 나같은 사람에게 적격이다.
아무르 강변 산책로가 잘 조성되어 있다. 강을 보며 하염없이 걸어가도 좋다. 걷다 지치면 중간에 아이스크림을 사먹기도 하고, 뱃속이 허전할 때는 샤슬릭(шашлык: 숯불에 구운 꼬치 고기요리)을 사먹기도 한다.
아무르강변에서 일광욕을 즐기는 하바롭스크 시민들. 강인지 바닷가인지.
가족단위로 강변에 나와 쉬고 놀고 이야기를 나눈다. 흡사 바닷가를 연상하게 일광욕을 즐기는 젊은이들도 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해변에서 보던 광경과 큰 차이가 없다. 그저 따뜻한 날씨에 물가에 나와서 해를 쪼이며 휴식하는 것이 일상적인 러시아 사람들의 생활이다. 행복이 뭐 별건가.
아무르스키 산책로
날이 후텁지근하여 강변 산책이 꺼려지면 도시 가운데를 관통하고 있는 산책로를 거니는 방법도 있다. 도시 위아래로 시원스럽게 나있는 아무르스키 산책로를 걸으면 나무 그늘도 있고 그만이다. 아무르강쪽에서 시작된 산책로는 주욱 걸어가다보면 하바스크 기차역과 맞닥뜨리게 된다.
그리고 신기한 것은 하바롭스크에는 한국 사람의 이름을 딴 거리가 있다는 사실. 바로 김유정(ул. Ким Ю Чена) 거리이다. 공산주의 나라 도시에서 빠지지 않는 레닌 거리, 칼막스 거리에 버금갈 정도의 규모다. 극동주의 공산주의에 혁혁한 공을 세운 한인이라고 하는데, 얼마나 큰 역할을 했기에 거리 이름을 만들 정도였을까. 신기할 따름이다.
# 웃픈 에피소드
2010년 6월이었을거다. 출장으로 하바롭스크를 방문했었다.
도심을 바쁘게 돌아다니며 엄청나게 따가운 태양 아래 그곳의 여름을 제대로 실감하면서.
더위를 식히러 들어온 카페. 저기 개 한마리가 팔자좋게 누워 잔다.
다니다가 너무 뜨거워 더 이상 걷기 어려울 정도로 진이 빠졌다. 도저히 안되겠어서 하바롭스크 광장 부근의 작은 쇼콜라드니짜(Шоколадница)라는 러시아 브랜드 카페에서 걸음을 멈췄다. 숨을 좀 돌리기 위해.
더위에 뜨거운 음료를 마실리 만무했다. 시원한 아이스 커피 한잔이 간절했다. 하지만 그 당시까지의 내 상식선에서 러시아에서 아이스커피를 시켜본 적이 없었다. 그냥 일반 '아드노 아메리까노(одно Американо: 아메리카노 한 잔)'만 마셔왔으니까. 그래도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이니 시원한 커피도 팔겠지.
여름 음료로 이런것도 팔더만 왜 아이스 커피는 없지?
종업원이 다가왔다. 러시아에서 습관이 된 의심병(?) 때문에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시원한 아메리카노 있어요?(У вас есть холодное Американо?)"
종업원은 심각하게 잠시 생각하더니(러시아 사람들의 순수한 면이기도 하다) 잠시만 기다려보란다. 주방으로 가서 누군가에게 물어본건지 뭘 알아본건지 다시 나에게 온다.
"가능할것 같네요(정확히 기억은 안나지만 당시 대답은 정말 '가능' Возможно이었을거다)"
그렇게 나는 '시원한'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하지만 곧 나에게 가져다 준 것은... 김나는 뜨거운 아메리카노에 얼음을 띄운 커피잔이었다. 종업원은 순진무구하게도 나에게 그 커피를 서빙하고 돌아섰다.
내가 커피잔을 들여다봤을 때는 이미 띄웠던 얼음들은 거의 다 녹아 모래알만한 것들이 둥둥 떠있었다. 결국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미지근한 아메리카노....
내가 이 도시 이 작은 카페에 너무 많은 것을 바랐나 싶어 웃음만 나왔다.
분명 그때 그곳은 아이스 아메리카노라는 개념이 정립되지 않았었나보다.
물론 지금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아이스(айс)나 살돔(со льдом: 얼음과 함께)이라고 하면 알아먹는다.
참 쉬운것도 어렵게 하는 나라다.
# 횡단열차를 타고 이제 시베리아로
짧은 에피소드를 끝으로 이제는 시베리아로 떠나볼까 한다.
하바롭스크에서 이르쿠츠크까지 기차로는 무려 3일이 걸린다. 유라시아 친선특급 여정 당시 가장 긴 기차 안 생활이었다. 기차 안에서 씻고 먹고 자고 놀고를 계속 다 해결해야 한다. 그래도 함께 하는 이들이 있다면 즐겁다. 시간을 즐길 수 있게 된다. 러시아 사람들과 같이 타게 되어도 시골 사람들은 정도 많고 착해서 러시아어를 못하더라도 통하는 무언가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장시간 기차여행의 백미는 잠시 정차할 때마다 지상에 내려와 시골 도시를 잠시나마 감상하는 것이다. 그리고 굳어진 몸을 풀어줘야 한다. 땅을 밟는 소중함이 얼마나 큰지 알게될 것이다.
자, 우리의 굳어진 정서와 얼어붙은 마음에도 함박웃음을 가져다 주는 즐거운 시베리아 여행길에 올라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