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어진 일은 막중했지만 늘 최선을 다했다.
내가 작성한 보고서들은 주로 사내 간부, 임원들이 참고할 만한 자료가 되었던지라, 예전에는 얼굴조차 못 봤던 사장님을 종종 직접 대면할 일이 있었다. 팀장님이 사장 보고에 늘 나를 대동해 데리고 들어가셨기 때문.
물론 필요해 그러셨겠지만, 아마도 언제 올지도 모르는 기회를 대비해 나를 눈에 띄게 하려는 생각이셨을 거다.
적어도 그땐 나도 그럴 수도 있을 거란 마음이 들어서,
계약직이지만 동기들이 하는 만큼 동일한 수준의 일을 했고,
팀원들도 내가 동기 과장들과 같은 레벨의 사람인 것처럼 '서과장'으로 대해줬다.
팀 주요 프로젝트에는 늘 나도 투입되었고,
주요 회의에도 나를 항상 참석시켰다. 야근에 저녁 회식까지 함께 하며 '으쌰으쌰'했다.
나는 팀 사람들 이야기를 들으며 팀워크 다지는 시간이 좋았고, 그들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고 또 어떻게 할 참인지도 궁금해 회식 자리에 웬만하면 빠지지 않았다. 그냥 그런 자리가, 사람과의 만남이 좋았다.
거기 있는 순간만큼은 내가 서과장이라는 착각이 들었다.
재입사 계약직이 아니라 마치 원래 계속 거기 다니고 있던 정규직인 양,
혹은 그렇게 될 수도 있을 것 같은 부질없는 희망이 별처럼 빛나고 있었다.
그래서 스스로 업무에 경계를 풀고,
팀에 어려운 일이 생기면 큰 도움 주기를 마다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회사에 값 없이 해주고 돌아오는 게 없으면
그저 봉사한 거나 다름 없지 않은가?
계약직의 사실을 망각하고 지낸 1년.
재계약 무렵, 원래 내 지위로 돌아가기 힘든 현실을 자각하게 됐다. 헛된 희망 때문에 동기들과 똑같이 일해서는 안 되겠구나 싶어, 돈 적게 받고 일도 그만큼만 하겠다고 선포하려 마음 먹었다.
하지만 나는 입을 떼기도 전에 반대로 어퍼컷을 맞았다.
"급여를 올려줄 테니 일은 더 해라. 업무 성과를 잘 내야 좋은 타이밍에 윗선에 어필할 명분이 되니."
바보 같은 난 그 순간 또 희망 고문에 넘어가고 말았다.
뭔가 속았다는 생각에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지만.
팀에서 겪는 이런 계약직의 고충은 팀 동기들과 푸는데 한계가 있었다.
당시 도피처는 비슷한 시기에 나처럼 계약직으로 재입사한 회사 선배님들, 이른 바 재입사 동기였다! 나보다 연배도 많고 육아나 결혼으로 회사를 그만뒀던 분들이라 인생 조언도 참 많이 해주셨다.
진영씨는 젊으니까 가능성이 충분히 있어!
일이 많지만 희망은 보이지 않는 나에게 좋은 기회가 있을 거라며 응원도 아낌없이 하셨다.
그리고 재입사 동기와만 나눌 수 있는 이야기거리가 또 있었다.
바로 정규직일 때는 몰랐던 계약직에 대한 차별 문제였다.
너와 나를 경계 짓고 '우리만의 리그'를 이끌어가는 정규직,
그에 비해 모든 여건이 취약한데 일은 더 많이 하는 계약직.
계약직이 되고 보니 이들에겐 인사, 복지 등 사내에서 제한되는 부분이 꽤 많았다.
문제를 제기해도 크게 개선의 여지는 없었다.
사실 이 세계에 들어오기 전까진 회사에 그토록 계약직이 많았는지 몰랐고,
그들 사이에서도 대우에 대한 편차가 크다는 사실도 처음 알게 됐다.
정규직으로만 살았으면 있는지도 몰랐을, 고쳐 쓰기 어렵고 난감한 그런 세상이었다.
그전까지는 단순히 '일 열심히 하며 살면 그만이지'하며 지냈는데, '어느 사회'에나 있는 이런 문제를 직접 마주하니 회사의 두 얼굴을 목격한 것만 같았다.
사회적 약자를 품고 가야겠단 생각이 든 건 그때부터였다.
아무튼 나는 이제 착각에서 깨어나 현실을 직시할 타이밍을 맞이했다.
회사에서 한 번 더 나를 깜짝 놀라게 했으니!
Point12. 비밀 상자는 사무실 밖에서 열린다!
사무실 바깥에서 팀 사람들과 보내는 업무 외 시간은 분위기를 소프트하게 만들어 준다. 요즘은 많이 줄었다고는 하나 회식 자리를 예로 들 수 있겠다. 솔직히 상사 면전에서는 막상 궁금한 이야기도 사무실 속 압박스러운 분위기나 사람들 눈치 때문에 입을 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회사가 아닌 다른 공간에서 팀원들을 만나면 대화 주제도 좀 더 개방적이 되고, 사무실에서는 허락 받지 못했을 일이 허용되기도 한다. 예전에는 승진 등 회사의 대부분 주요 사안들이 주로 흡연실에서 오간다고 했다.(지금은 요직 분들이 대부분 비흡연자가 되셨다고는 하나) 길지 않은 시간이지만 서로 담배 한 개피씩 나누며 그 사이 업무 협의가 이루어진다. 사무실이 아닌 공간에서 개인 대 개인의 만남이 이루어질 때 예민한 주제들 꺼내기 더 좋은 환경이 조성되는 것이다. 회식이나 외부 활동이 있을 때, 평소 어렵게 느끼는 상사에게 고충을 털어놓거나, 인사와 관련된 질문이 있을 때 넌지시 던져 보자. 나도 모르는 비밀의 상자가 열릴지도 모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