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그림자놀이 3부

1. 기억과 추억 사이

by 운정

정선이 어떤 남자를 만나고 있는 것을 본 것은 미정이 상담받기 시작한 지 2개월이 지나갈 무렵이었다.

1.5층 화장실을 들러서 나오는데 위층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 한쪽벽에 기대어 대각선으로 눈을 올려 본 순간, 어렴풋이 어떤 남자가 정선을 끌어 안는 것이 보였다.

정선의 낮은 목소리가 천정이 높은 탓에 생기는 에코현상으로 웅웅거리며 들려왔으나 무슨 소리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곧이어 또각또각 계단을 오르는 구둣소리가 들려 왔다.

고개 숙이고 벽에 기대어 있는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마치 헤어지는 연인같아 보였다.

미정은 가슴이 쿵쾅거렸다.


그때서야 미정은 지우의 연인인 정선에게 상담을 받고 있다는 것을 잊어버린 자신을 발견했다.

두달 전까지만 해도 '마음그늘' 상담사가 지우의 연인이라는 그 자체만으로 몹시 흥분되었다는 것도

기억해내었다. 솔직히 처음엔 상담받는다는 것보다 호기심이었다.

그녀를 가까이서 관찰하는 것에 대한 설렘이 컸다.

심리상담은 그저 상담사가 이것 저것 묻는 말에 대충 대답하면 되겠지 라고 막연히 생각했다.


무기력하고 지루하게 살고 있던 그녀의 삶에 지우가 어느날 갑자기 나타났다.

아들의 바이올린 선생으로 그리고 어떤 여자의 연인이 되어 미정의 좁디 좁은 생활 동선안에 들어왔다.

지우와의 흐릿했던 과거의 기억이 생생한 영상처럼 떠오르며 미정의 삶에 변화가 오기 시작했다.

미정은 그가 예솔이 바이올린 레슨하러 방문하는 날이면 카페에서 일찍 퇴근하였고 아들의 저녁식사를 준비하면서 어느덧 양을 늘리고 있었다. 미소를 지으며 현관을 들어서는 그를 맞이하며 아들이 저녁을 먹고 있다고 말하는 자신의 음성을 들으며 화들짝 놀라기도 했다.

그 목소리는 자신이 내는 소리면서도 아주 낯선 다정함이 배어 있는 소리였기 때문이었다.


"그렇잖아도 저녁을 안먹어서 그런지 시장하네요. 주시면 맛있게 먹을게요."


자연스럽게 식탁에 앉는 그를 보며 미정은 자신도 모르게 민첩하게 밥과 국을 푸고 있었다.

그가 오는 날이면 아들과 함께 현관에 나가 인사를 하며 맞이하였고 저녁식사를 함께 했다.


몇달 전, '마음그늘' 상담소에 자신도 모르게 예약전화를 했던 충동적 행위에는 정선에 대한 호기심이 컸다.

그런데 그녀의 상담실 방문 첫날부터 그렇게 눈물을 흘리고 잠까지 잤다.

더구나 자신이 그렇게 말을 많이 하게 될 줄은 전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녀에게 상담받기 시작하고 10회기가 넘어가는 지금까지 미정은 정선과 지우의 관계에 대한 어떤 것도 궁금하지 않았다.


정선이 건네는 차 한잔, 말 한마디 한마디, 그리고 들려주는 음악은 마치 '그녀가 나인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로 스며들었다. 상담실을 처음 방문하던 날 거의 한시간 가까이 잠을 자고 일어나 맞은 편 소파에 기대어 눈을 감고 있던 정선의 모습에서 편안함을 느꼈다.


미정은 자신도 모르게 정선에게 스스럼없이 옛날 이야기를 들려주듯이 천천히 자신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그들은 같은 표정을 짓고 같은 주름을 지으며 함께 웃고 울며 긴 얘기를 나누었다.


"어떤 때는 온통 활기차게 살아가는 사람들만 보였어요. 나만 빼고 모두 밝음속에 있더라고요. 때로는 그것을 바라보고 있으면 나도 덩다라 기분이 좋아질 때가 있어요. 어떤 때는 슬픈 영화를 보는 것처럼... 슬픈 영화는 주로 제가 주인공이 되기도 해서 우울했지만요."


미정은 정선이 지우의 연인임을 자신이 알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선에게 말하면 지우도 알게 되겠지, 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복잡해졌다.


그동안 아들의 바이올린 레슨을 오는 지우를 보면서 정선을 떠올리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아들의 바이올린 선생님일 뿐이야' 라고 자신을 합리화하고 있었는지, 지우를 보면 밝아지는 자신을 모르는 척 하고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더구나 그녀는 자신이 정선에게 상담을 받으면서도, 일주일에 한번씩 지우를 집으로 맞이하면서도 지우와 정선의 관계에 대해 신경쓰고 있지 않은 자신에 대해 놀라울 따름이었다.


그동안 정선과 함께 과거의 무섭고 어두운 기억을 거닐었다.

함께 있어줘서 무섭지 않았고 안심이 되어 현재로 돌아오던 기나긴 그 길을 그녀와 함께 했다.

덤으로 15년만에 만난 지우, 대학시절 음악과 함께 했던 아름답던 추억이 따라왔다.

그와 함께 부드러운 바람을 맞으며 콧노래를 부르며 오솔길을 거닐듯 추억을 되새김질한 것은 아니었을까.


기억과 추억사이에서 미정의 마음은 놓여나고 있었다.

쿵쾅거리던 심장이 천천히 제자리를 찾으며 숨이 길게 깊이 내 쉬어지고 가슴이 편안해짐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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