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사계가 지나가면
봄볕이 따사로왔다.
오늘 연주연습이 있는 날이었다.
지휘자가 몸이 좋지 않다며 일찍 연습을 마치는 바람에 오후 내내 시간이 비게 되었다.
보통은 연습실에서 혼자 연습을 하곤 했지만 오늘은 나태해지고 싶었다.
상담실 서재에서 시간을 보내다 예솔이 바이올린 레슨을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교에 가있는 정선에게 전화를 했다.
상담이 없는 날, 가끔 그녀의 서재에서 소파에 기대어 음악을 듣거나 연주연습을 할 때가 있었다.
주인장이 없는 상담소를 들어가기 위해서는 허락을 받아야 했다.
그녀의 상담소는 아담했다.
음악듣기를 좋아하는 그녀는 명품옷은 안 입어도 스피커와 앰프만큼은 악기와 공간의 자연스러운 울림을 표현한다는 그 명품브랜드를 선호했다.
그녀의 상담실 서재는 스피커와 어울리게 나무색과 결이 돋보이는 책장과 소품들이 가득차 있어 멋스럽고 옛스럽고 고급스러웠다.
지우는 이곳을 정선과 닮은 공간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그녀와 그 공간에서 어깨를 기대며 음악을 듣고 있을 때가 가장 행복했다.
그리고 한없이 그녀곁에 머물고 싶다고 생각했다.
말없이 있어도 안심이 되는 사람,
기대어 있어도 무겁지 않은 사람,
그녀의 숨소리를 따라 오르내리며 곁에 있고 싶었다.
언제나 정선은 계단을 오르곤 했다.
그도 오늘은 정선처럼 계단을 따라 올라갔다.
3층에서 숨을 크게 한번 쉬고 다시 오르려 내딛는 순간, 누군가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올려다보니 미정이 반가운 기색으로 웃으며 내려다 보고 있었다.
"6층가나보군요?"
"네, 마침 시간이 남아서 좀 쉬려고요."
"아, 그렇군요."
계단중간쯤에서 스치며 그들은 인사를 주고 받았다.
미정은 내려가다 말고 잠시 머뭇거리다 올라가고 있는 지우를 불렀다.
"지우선생님, 상담소에서 저와 함께 차한잔 하실래요? 마침 레슨 날이니 이따 집으로 함께 가는 건 어때요?"
지우는 망설이다 정선에게 전화를 걸었다. 정선이 상담소장이니 얘기는 해야 할 것 같았다.
알았다, 면서 집으로 바로 퇴근한다는 정선의 목소리를 함께 들었다.
지우는 미정과 나란히 계단을 세듯이 천천히 올라갔다.
"요즘 예솔이는 어때요? 부쩍 집에서 연습을 많이 해요."
"예솔이가 재능이 있어요. 음감이 좋고 바이브레이션이 좋아요, 특히 레가토(음과 음사이를 부드럽게 잇는 연주법)를 잘 연주해요. 감성이 정말 깊은 아이에요. 제가 가르치는 아이중에 젤 잘합니다."
"아유, 저를 봐서 예솔이를 칭찬하지 마시고요. 진짜 소질이 있나요?"
"아, 모르셨어요? 예솔이 바이올린 전공하겠다고 하던데요."
"네? 전 금시초문이에요. 예솔이가 진짜 그렇게 말했어요?"
"사실 지지난 주에 말했는데, 예솔이가 아직 말씀을 드리지 않은 모양이군요. 6학년이라 유학까지 고려한다면 올해부터 많은 경연대회에 나가야 합니다."
예솔이는 예진이 일로 미국에 가려는 엄마와 이를 못마땅해하는 아빠와의 대화를 들었다.
오늘 아침식사하면서도 아무말 하지 않았다.
미정은 예솔이 6학년이 되면서 조금 과묵해진 것 같다고만 생각헸다.
예솔이에게 좀더 신경을 써야 겠다고 생각했을 때 6층 상담소에 도착했다.
상담소 서재는 늘 느꼈지만 정말 아늑했다. 집보다 편했다.
미정은 상담소가 익숙한 지, 주방에서 물을 끓이고 차를 내려 들고 나왔다.
지우가 마치 손님이 된 듯 미정은 그에게 차대접을 했다.
그또한 매우 자연스럽개 미정이 따라 주는 차를 마셨다.
<파아졸라>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사계>가 흘러나왔다.
원제는 <사계절의 포르테나>였다. '포르테나'는 아르헨티나의 민속음악을 뜻했다.
대중적인 탱고음악을 연주음악으로 승화시킨 피아졸라의 음악은 감정을 폭발시키는 힘이 있었다.
'항구의 가을'은 솔로 바이올린의 특수한 주법으로 강렬한 연주로 시작이 되는데
첫소절부터 <피아졸라>의 가을은 뭔가 절절하고 극적이며 긴장이 고조되며 가슴이 뛰게했다.
미정은 옛 생각이 났다.
지우와 함께 했던 교정의 산책길, 이야기들이 떠오르며 가슴이 고동쳤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음악에 발을 까딱거리며 음악소리에 젖어 들어갔다.
겨울악장의 현악기의 무거운 반주를 배경으로 독주 바이올린이 자유분방한 집시스타일의 멜로디를 연주하자,
미정은 마치 자신이 자유로운 영혼이 된 것 같았다.
마주 앉은 지우와 시선이 마주쳤다.
미정은 미소가 절로 나왔다.
지우는 몇 달전, 미정을 15년만에 만났던 첫날을 기억했다.
그녀는 쓰러질듯이 가늘었고 백지장같이 하앴다.
지금의 그녀는 생기가 넘쳐흘렀고 몸짓이 활발했다.
지금 눈앞의 그녀는 대학시절의 미정이었다.
이렇게 미정과 음악을 한공간에서 들으리라곤 상상한적이 없었다.
미정은 대학을 졸업한 후 한번도 지우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날, 지우는 자신의 무모한 키스로 인해 미정이 냉정하게 자신과의 관계를 단절했다고 생각했다.
그날이후로 미정의 소식을 듣기 위해 지우는 사방팔방으로 찾아 다녔지만, 곧이어 들려온 소식은
그녀가 결혼한다는 것이었다. 가슴이 아팠다. 그러나 그녀를 만날 방법이 없었다.
너무나 멀리 그의 곁을 떠나갔다. 닿을 수 없는 곳으로 그녀는 떠났다.
지우는 교정을 거닐며 미정을 느끼며 미정을 연주했다. 졸업할 무렵 그는 드디어 미정을 잊기로 했다.
그녀와의 눈맞춤도 입맞춤도 잊기로 했다.
자신의 처지에서 그녀를 찾아 어찌할 수 있었던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연주가 끝나자, 미정이 말했다.'
"우리의 사계들이 <피아졸라>의 '사계'처럼 흘러간 것 같아요."
지우는 그 말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무엇인가 지지부진한 흐름이 아니라 격정적이며 자유롭고 매혹적인 감성이 짧고 강렬하게 그들의 젋음을 훑고 지나가버렸다. 그들의 첫사랑은 그렇게 갔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미정을 바라보았다.
"선배가 건강했던 그 시절의 모습만 저는 기억합니다. 아름다웠어요. 그 시절의 선배는 요."
"정말 고마워요.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요. 그리고 정말 미안했어요."
미정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