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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아 Nov 16. 2024

석화의 꿈

'눈치와 염치' 그 뒷이야기


퇴근길에 아빠한테 전화가 왔다.

실속도 없는 회의에, 줄줄이 수업에, 학생에게 치이고 학부모에게 시달리고...매가리없이 절여진 김장 배추같이 몸도 마음도 늘쩍지근하던 와중이라 저절로 또 말뽄새 퉁명스럽게 네, 하고 전화를 받았는데... 거두절미 훅 들어온 뜻밖의 대사.


“석화가 아니었어.”

“응?”

“아까 낮에 말이다...잔굴이 아니었다고.  나는 그걸 염두에 두고... 니 할머니가 그런 건 참 잘하잖아.”      

그제야 알아들었다. 아.. 아까 낮에 김장김치...그래서....그랬구나. 운전 중에 블루투스 스피커폰으로 받았던 전화를 수화기 모드로 바꾸고 차를 잠시 갓길에 세웠다.     


“어제 용인에서 김장 김치 가지러 오래서 갔지. 점심 먹고 가라고 붙들어서 김장 김치 한 거랑 수육이랑 해서 한바탕 잘 먹었어. 교회 사람들, 마을 사람들 다 같이 한 김장이었으니까...사람들 들고 나고 정신 없더만. 할머닌 어떠냐구? 잘 계시지 뭐... 여전히 참... 잘 드시데... 어제도 돼지고기 삶은 거 한 접시 다 먹을 기세여서 나중엔 숫제 그릇째 치워버렸지. 어? 알아보더냐구? 글쎄다... 이젠 나도 잘 못 알아보는 것 같어....내내 먹을 것만 찾나보더라. 저녁까지 먹고 천천히 오지 그랬냐구? 야, 무슨... 김장한다고 벌여놓은 판에 할머니는 옆에 그러구 앉았지....버글버글 정신 사나운 와중에 점심 먹고 가라 해서 앉긴 했지만,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르겠더만. 그래도 노인네 점심 잘 자시는거 보고...똥 너무 많이 싼다, 고만 드셔라.. 잔소리도 하고, 노인네 돌봐주느라, 김치하느라 고생 많았다 ㅇㅇ이, ##이 누이들한테 공치사도 하고 돈도 섭섭찮게 좀 주고... 그러고 좀 더 있다가 노인네 까무룩 오후 낮잠 드는거 보고, 퇴근길 차 막히기 전에 일어섰지.


니 엄마나 나나... 장거리 운전 끝에 피곤하기도 하고, 점심을 잘 먹어 그런지 저녁은 영 생각이 없어서 밥때를 놓치고 말았다. 그래도 한술 뜨고 자야지 싶어서 낮에 용인서 김치 얻어온 거나 꺼내놓고 간단히 먹자 그랬지. 근데 실은, 아까 낮에 김칫속이 너무 매웠거든. 아무래도 니 할머니 김치만 못했겠지...고춧가루도 니 할머니가 받아다 쓰던 거 아니었을거고... 니 엄마가 자기도 그랬다며 무도 더 썰어 넣고, 양파도 넣었던가? 암튼, 뭘 어찌 손을 봤는지 낮에 먹을 때보단 훨씬 먹을만 해지긴 했는데, 아까 낮부터 간절했던 굴이 없는 거야. 간단히 먹자고 했다면서 뭔 또 굴타령이냐고? 그러게 말이다... 내내 먹던 할머니 김장 김치랑 얼추 비슷해져서 그런가... 이왕 먹는거 꼭 굴이랑 같이 먹겠다 싶어지니, 그만 굴없이는 안먹고 말지 싶은거야. 그래서 어제 저녁엔 무,양파 추가해 놓은 김칫속 하루 더 재워놓고 안먹구 그냥 잤어. 내일 맛있게 먹자 참자.. 그랬지.      


그리고 오늘 오전에 각자 볼일 보고, 니 엄마 들어오는 길에 시장 들러 굴 사가지고.. 어제 먹던거 이어먹자 하고 앉았던 거야. 허허.. 그래 니 말이 맞다. 김장 김치 한번 제대로 먹겠다고 아주 만반의 준비를 한거지. 너 알잖아. 내가 또 먹을 땐 지대로라는거. 암튼, 그렇게 앉았는데. 굴이...굴이...영 아닌거야. 그게말이다.. 굴이 잘아야하는데 크기만 커다라니, 꼭 퉁퉁 불은 손가락 마디 잘라놓은 거 같이.. 거 뭐냐.. 뭐라더라? 응? 아 그래 맞어. 너 아는구나. 봉지굴. 그거밖에 없었다며 니 엄마가 사와서 먹긴 했는데... 잔굴이어야 하는데 말이다... 쪼끄만하니... 석화가 아니었어. 너 석화가 뭔지 아냐? 그래 맞어. 껍데기에 붙은 거. 양식굴 아니고 값도 더 비싸거든. 나는 그런 걸 염두에 두고 있었지. 왜냐믄, 할머니 있을 때 김장김치에는 항상 그거였으니까... 니 할머니가 그런건 참 잘하잖어.


암튼 이래저래 맘이 그렇드라.. 그래서 내가 굴을 이렇...게 빤히 들여다보며 혼잣말처럼 그랬나보다...이거 내가 너무 기대가.. 꿈이 컸나 보네.. 그랬드니 니 엄마? 이게 뭔소리냐.. 열받았겠지. 기막혀 쳐다보더라. 흐흐흐...근데 나는...그게 니 엄마 열받으라고 한 소리 아냐.. 그냥. 좀 복잡했다. 맘이 그렇드라구... " 

   

“아. 맞네. 아빠 꿈이 너무 야무졌구만.. 그건...이젠 이룰 수 없는 꿈이지. 그러니까. 악마는 디테일.. 이 아니라 디테일은 굴에 있었고만...‘용인‘에서 김치를 가져왔다고 했을 때 알았어야 하는데 나도 이제 늙어서 감이 떨어졌나벼요. 쏴~리.”




올해가 지나면 센테너리(centenary)를 맞이하게 되는 나의 할머니는, 지금은 돌아가신 이모 할머니의 따님, 그러니까 아빠의 이종 사촌 누이이자, 나에게는 5촌 당고모의 용인댁에서 지내고 계신다. (촌수가 정확한지는 모르겠습니다. 아무리 검색을 해봐도 제 부족한 지식으론 이건가 싶은데.. 혹시 틀렸다면 정정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엄마가 대학생 언니,오빠들을 가르치러 학교로 강의를 하러 간 날이면, 학교에서 돌아온 나는 할머니와 함께 있었다. 내 어린시절의 기억속 할머니는 단 한번도 푸근한 적이 없었다. 어이구 내 강아지...이런 ‘다정한 할미 말투'같은 건, 할머니가 저녁 마다 빼놓지 않고 보던 일일 연속극에나 나오는 대사였다.      

할머니는 손녀인 나뿐 아니라 다른 모든 이들에게도, 못한 건 가차없이 지적하고 잘한 건 시큰둥해했다. 트집을 잡을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는 사람처럼 늘 부정적인 것을 먼저 말하고 대답도 듣지 않고 돌아서 가버리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런 할머니가 우리에게 한 애정 표현은 음식이었다. 나는 그걸 애정 표현이라고 하지만, 실은 그건...

우리 엄마가 결혼 직후 한달도 안된 물정 모르는 어린 새댁이었을 때, 합의는커녕 사전 의논 한마디 없이, 할머니와 당시 대학생이던 삼촌까지 앞세우고 들이닥친 세 고모들... ‘모셔가라’ 서슬에, 군소리 한마디 없이 그 모든 상황을 받아들였던 건. 그리고 시어머니와 도련님과 함께 살던 그 작은 신혼집에서 삼촌이 결혼하며 분가한 이후로도 시어머니와 동고동락한 45년 세월에 최선을 다한 건. 그 최선이 엄마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는 이정표였기 때문이듯, 그렇게 할머니는 음식으로 자신의 자존심을, 자존감을 지키고, 존재 가치를 증명하고팠던 게 아닌가 싶다.     


할머니는 음식 솜씨가 좋았다.

자그마한 체구의 할머니는 키만큼이나 손도 참 작은데, 그 작은 손이 재바르게 움직이면 신기하리만치 뚝딱! 이런저런 요리가 완성되었다.

거의 매 끼니마다 국이 있어도 찌개가 올라왔고, 생선이 있어도 고기가 곁들여졌다. 명절도 아닌데 녹두를 갈아 잘게 다진 돼지고기와 섞어 녹두전을 부쳤고, 아침마다 아빠의 아침상에 올랐던 메주콩 삶은 물을 갈고 난 찌꺼기로 하루는 간장 양념만 살짝 얹은 뽀얗게 하얀 비지찌개를, 또 다른 날은 뼈째 붙은 돼지고기와 김치를 넣은 매콤한 빨간 비지찌개를 끓여 상에 올렸다. 들큰한 양념 범벅의 식당 제육볶음은, 달지 않으면서도 은은하게 매콤하고 풍미 넘치는 할머니의 제육 볶음에 비할 바가 못되었다. 오래 치댄 반죽을 직접 썰어 진하게 우린 멸치 국물에 또아리 지어놓은  칼국수, 새우젓국으로 양념을 한 애호박 새우젓 찌개. 늙은 호박에 동부콩을 듬뿍 넣은 호박죽, 생일과 무관한 갈비찜과 잡채, 학교가는 나와 동생의 아침으로 구워낸 빈대떡스러운 할머니표 팬케이크까지... 레시피도 없는 할머니의 메뉴는 끝이 없었다.      


아파트 화단을 다 뒤지고 다니며, 김치통 사이즈에 딱 맞는 맞춤한 돌을 그 쪼끄만 노인네가 손수 들고 와, 하루 반나절을 소독하고 말린 누름돌은 여름이면 할머니의 오이지 통 에서 수십년 넘게 온 힘을 다해 '무게 넘치게' 제 할 일을 다했다. 찬바람이 불고 겨울이 시작될 무렵이면, 여름내내 일렬 종대로 자리를 지키던 오이 소박이들이며 열무김치들이 자리를 내준 김치 통속에, 나박나박.. 흰눈이 내리듯 하얗고 납작한 작고 네모난 배추, 무 조각들이 아름다울 만치 일정한 크기로 소복하게 쌓여 나박김치로 익어가며, 이듬해 봄까지 우리의 겨울 한철 식탁을 맛깔나게 해주었다. 젓갈과 고춧가루를 많이 넣지 않아 담백하고 시원한 할머니의 김장 김치를 먹어본 사람들은 이제 다른 김치는 못먹겠다며, 할머니가 10년만 젊었으면 김치 장사로 대박이 났을거라고 아쉬워했고, 그 옆에서 나는 지금도 늦지 않았다며, 할머니는 김치 담그기만 하라고, 나머지 일은 내가 다 알아서 하겠다고 진지한 척 맞장구를 치기도 했다.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해주면서도, 끊임없이 머리가 그게 뭐냐. 옷이 그게 뭐냐. 신발을 똑바로 안 신었냐... 괜한 트집이라고 밖에 보기 힘든 할머니의 지적질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할머니가 메인 쉐프 역할을 하긴 했지만, 엄마도 음식을 안 한 건 아니었다. 할머니가 워낙 쉽게 쉽게 음식을 하시니 주방 보조 정도만 해도 충분했을 텐데도, 워킹맘이었던 엄마는 나름으로 늘 요리를 하고 우리를 위한 밥상을 준비했다. 강의 준비에 두 아이 건사까지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면서도, 수업이 없는 날에는 ‘까삭까삭한’ 설탕 옷을 입힌 고구마 맛탕을, 굵은 쌀떡에 잘게 썬 소고기와 대파를 듬뿍 넣은 떡볶이를, 맘먹은 날 특식으론 요리책에서 튀어나온 듯한 비주얼의 큐브 모양 안심 스테이크 볶음을, 마흔 중반이 훌쩍 넘은 내게 영원한 소울푸드가 되버린 시원한 오징어 국 등등...두 여인이 경쟁이라도 하듯 날마다 수많은 요리를 해댔다.


엄마의 솜씨도 결코 나쁘지는 않았지만, 평생 공부만 하느라 상대적으로 요리 경력이 적을 수 밖에 없는 엄마가 이북과 접경한 경기도 최북단에서 나고 자라 남북한의 음식을 골고루 섭렵한 타고난 손맛의 할머니를 이기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이었다. 아니, 실은 이기고 지는 싸움이 아니었는데도 지금 돌이켜보면, 할머니와 엄마는 우리의 입맛을 인질로 삼아 총성없는 전쟁을 하고 있었던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세월이 흘렀다.

엄마가 정년퇴직을 하고 집에 있게 되고 나도 동생도 결혼을 해서 분가를 하며 엄마도 이젠 '할머니'가 되었다. '할머니'와 '왕할머니'. 두 노인이 한집에서 나란히 보내는 시간이 점점 늘어났다. 분명 별일이 없는데도, 친정에 갈 때마다 느껴지는 집안 공기는 묘하게.... 불편했다.      


언젠가부터 할머니가 음식을 섞기 시작했다. 국이 있어도 찌개, 생선이 있어도 고기를 따로 올리던 할머니는 하얀 비지찌개와 빨간 비지찌개를, 된장찌개와 고추장찌개를, 미역국와 무국을 섞어버렸다. 그것이 엄마를 질색하게 했다.  이제는 끼니때마다 식사를 챙기는 것을 엄마가 했는데, 다 차려놓은 밥상 앞에서 나오세요.. 점심드세요. 저녁드세요.. 몇 번을 말해도 할머니는 번번히 밥 생각없다.. 안먹는다 하다가 밥상을 다 치우고 난 후 슬그머니 홀로 앉아 컵라면을 끓여드시거나, 되는대로 밑반찬을 한 접시에 담아 일꾼의 식사같은 거친 밥을 드셨다. 그게 또 엄마를 미치게 했다.      


할머니는 집에 있는 것을 다 퍼다가 남에게 가져다 주는 한편으로, 아들딸이 주는 용돈을 모았다가 집 앞 수입품 가게에서 끊임없이 이상한 것들을 사다 날랐다. 그 자리서 20년 넘게 장사를 하고 있는 수입가게 여사장에게 우리 할머니는 그야말로 ‘봉’이었다. 깔별로 같은 모양의 티셔츠를 사와서 안맞는다며 날 다 주기도 했고, 아장아장하는 손주들, 나의 아이와 동생의 아이에게 서랍에 숨겨놓았던 수입가게에서 산 사탕이며 카라멜을 나눠주기도 했다. 이가 썩으니 그만주라고 아무리 말려도 소용이 없었다. 가끔씩 옷장을 열어보면 못보던 쟈켓이며 스카프 따위가 들어있기도 했다. 한번은 엔초비 통조림을 사왔길래, 이게 뭔줄 알고 샀냐 물으니, 이제 고작 4살인 조카딸 아이가 그걸 좋아해서 샀다고 해서 아연실색하게 하기도 했다.

   

친정집에 가스밸브 자동잠금 장치가 설치되었고, 엄마, 아빠가 짧은 여행을 가거나 할 때, 퇴근한 동생이나 내가 들러 별일 없는지 살펴야하는 일이 잦아졌다. 한번은 엄마 아빠가 강원도에 3박4일 정도 여행을 갔었다. 그 전날 저녁에 동생이 할머니를 들여다보긴 했다고 했는데, 그날 오후 왠지 할머니한테 가봐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불현듯 들었다. 문을 열고 집에 들어가니, 늘 앉아있던 방안 대신에 할머니는 화장실에 엎드려 있었다. 의식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몸을 가누지 못하고 똥냄새가 심하게 났다. 그런 일은 처음이라 놀랐지만 최대한 놀라지 않은 척 침착하게 이그.. 냄새난다. 씻자 할머니.. 하며 할머니를 부축했는데, 결국 그날 난 끝까지 할머니를 씻기지 못하고 화장실에서 쫓겨났다. 할머니는 엉금엉금 기어서 샤워부스 아래 앉아, 한사코 똥 싼 팬티를 벗으려 하지 않고, 괜찮으니 나가라고 역정을 내며 나를 떠밀었다. 나는 결국 화장실 문 밖에서 수건을 들고 기다려야 했다.

몸을 가누지 못하면서도 똥 싼 팬티를 한사코 당신 손으로 빨아 널고 나오는 걸 보니, 그래도 그때까진 할머닌 정신은 멀쩡했던 듯 하다.     


그 일이 있고나서 엄마,아빠는 1박 이상의 여행을 더 이상 가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요양원, 간병인 등의 이야기가 나온 것도 같았지만, 아직 정신 멀쩡한 노인네를 왜 요양원에 보내냐고 엄마가 한사코 반대를 했다고 들었다. 그러다가 먼저 돌아가신 할머니의 동생인 이모 할머니의 따님이(나한테는 5촌 당고모쯤 되나보다) 할머니를 자신의 집으로 모셔가는게 어떻겠냐고 했단다. 엄마도 아빠도 이미 일흔이 넘은 파파 할배, 할매였다. 자기 한몸 건사하기도 버거울 나이의 칠순 노인네 둘과 구십 중반도 넘은 노인네 하나가 한 집에서 엉기어 구물대니, 보기에도 딱했을 거다. 아빠가 집안의 장손으로 이모 할머니의 아들 몫까지 그동안 잘 해온 것도 있고, 할머니와 돌아가신 이모 할머니가 다른 형제간 중에서도 각별하여, 할머니는 당고모에게 친정엄마나 진배없이 스스럼없기도 했다.

"우리 엄마도 나도 이모덕을 얼마나 봤는데.. 노인네 좋다하면 그냥 보내요. 엄마 가고 적적한데 나도 좋지 뭐..여긴 도와줄 사람도 많고. 00엄마 혼자 그거 절대 못해. 앞으로 점점 더 힘들어 질걸..."

한사코 미안해하는 아빠에게 당고모는 웃으며 말했다. 당고모집이 전문 요양원은 아니었지만, 맘놓고 나가 앉았을 풀밭 한뙈기 없는 아파트보다는, 앞마당 뒷마당도 있고 작지만 텃밭도 있는 서울 근교의 땅집이 노인네한테 더 편하지 않겠냐며 모셔가겠다는 제안에 제일 반색을 한 건, 엄마도 아빠도 아닌, 할머니 당신이었다.      


그날로 당고모를 따라나선 할머니는 45년을 함께 산 아들, 며느리 집을 떠나 처음부터 거기가 당신 집이었던 양 돌아올 생각을 안 했다. 아무리 당고모가 먼저 제안하여 모셔갔다지만, 노인네를 돌보는 일이 황혼 육아 못지 않게 손이 많이 가고 신경이 쓰일 터였다. 게다가 당고모 역시 이팔청춘도 아닌 이미 60을 넘어선 중노인이었다. 요양원비 납입하듯 정해진 날짜에 따박따박은 아니더라도, 아빠는 할머니 용돈 드리라는 핑계로 당고모 몫까지 매번 신경써서 넉넉히 챙겨드리긴 했다. 그래도 영 미안해서 몇 달만 바람 쐬고 집으로 오시라 해도, 할머니는 잠시 증손주들 보겠다며 친정집에 다녀왔다가도, 해가 지기도 전에, 이제 ‘집’에 가자며 당고모를 앞세워 야박하다 싶을만치 뒤도 안돌아보고 가버렸다.     


아빠가 전하는 소식을 통해 듣는, 가족 단톡방에 올라오는 사진 속에서 보는 할머니는 백수(白壽)가 가까워 가는 노인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여전히 짱짱했다. 김장 김치 담그러 모인 동네 아낙들과 교회 자매님들 한켠에 앉아 배춧잎을 휘두르며 오만가지 참견을 하거나. 오이지를 담글 때가 되었다며 다라이 한가득 오이를 쌓아놓고 소금으로 문질러대거나. 마당 테이블에 앉아 꽃을 바라보며 웃는 듯 우는 듯 햇살에 눈을 찡그리는 할머니의 모습을 사진으로 보며, 우리 가족은 아직도 왕성한 할머니의 기운과 여전히 형형한 생에 대한 의지에,

“우리 할머니 아직 쏴롸있눼.. 대단허다..정말..” 감탄을 마지 않았다.      


할머니가 제일 좋아하는 장소 마당 테이블. 또 누굴 보고 저리 지적질이실까 ㅎㅎㅎ

지팡이를 동동 짚고, 동네 할머니들 부축을 받으며 마을 입구에 새로 생긴 ‘톰 앤 톰스’ 카페 로 마실을 갔는데, 아메리카노에 ‘크뭐시기‘라 하는 빵을(아마도 크로와상일 듯) 혼자 다 자시더라, 미장원에서 머리를 자르며, 어찌나 총기있게 오지랖을 떠시는지 미장원 원장님이 기함을 하더라는 소식을 들은 지 얼마 안된 것 같은데, 그 소식에 이어 ’가끔’ 사람을 못 알아보는 일이 이제는 점점 잦아지고 신생아처럼 잠을 자는 시간이 늘었다고 했다. 그러더니 하루는 아무것도 못 먹고 드러누우셨다고 걱정스러운 전화가 왔다. 아무래도 식구들이 좀 와서 지켜보고 있어야 할 것 같다는 무거운 전갈에 온 식구가 출동하고, 미국에 사는 작은 아버지에게까지 연락을 하고 비행기표를 예약하네 마네. 한바탕 난리를 치뤘지만... 몇칠 후 할머니는 다시 혈색이 돌아오고 식사도 잘 드시고, 맥락없긴 하지만 말씀도 많이 하신다고, 당고모가 밝은 목소리로 전했다. 그 후로도 온 식구가 용인으로 출동한 일이 몇 번있었으나 그때마다 다시 좋아지시고, 한번 그러고 나면 병치레한 어린아이가 부쩍 크듯이 오히려 더 건강해지시고 혈색도 좋아지셨다.


왕할머니를 도와주시는 천사 할매들. 나란히 손잡고 새로 생긴 <탐 앤 탐스> 마실가는 중


작년 가을 추석 무렵, 할머니를 찾았을 때 할머니는 나의 아들 장초딩을 앉혀놓고 연신,

“아이고 아무개야.. 너희 할아버지가 살아 널 보면 얼마나 좋아했겠냐,”를 반복했다. 너희 할아버지, 그러니까 나의 아빠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그 앞에 앉아있는데도.  할머니는 내 아이를 당신 둘째 아들의 아이, 그러니까, 결혼하기전 엄마의 신혼집에 같이 살던, 나의 작은 아버지의 아들이자 나의 사촌 동생인  00이라 부르고 있었다.

작은 아버지는 80년대 초반 D그룹에 입사하여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 는 회장님의 명을 받들어 회사 생활하는 내내 주재원으로 해외를 떠돌더니, 퇴사하고 할 일이 없어지고 나서도 여전히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고 영주권을 얻어 그곳에 뿌리를 내려버렸다. 덕분에 신혼 초부터 줄기차게  ’롱디‘(long distance)' 며느리가 된 작은 엄마는 일년에 두어번 전화와 입금으로 본인 몫의 효도를 다했고, 할머니와의 45년 구구절절 일상은 고스란히 우리 엄마 몫이 되었다.

할머니의 99년 인생 통 털어 본 시간이 몇 달도 채 안 되었기에, 더 사무치게 그리웠던 걸까. 할머니는 이제는 두 아이의 아범이 된 나의 사촌 동생의 이름을, 내 아이를 보며 부르고 있는 것이었다. 덕분에 멀쩡히 살아있는 그 아이의 할아버지는 그날 오후 내내 ’고인‘이 되어야 했다.


할머니, 나는 장초딩입니다. 우리 할아버지 요 앞에 살아계시는데요. ㅎㅎㅎ


그리고 지난 가을 추석 무렵에, 오랜만에 보러 간 할머니는 이번에는 나를 붙들고 갓 돌이 지난 증손주, 내 동생의 아들을 만났던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름도 없이 그저 ’아가‘라고 부르며 “쪼그만게 요오오렇게... 달려와서 나를 보고 ’삥긋‘ 웃더라.” 소리를 10번도 넘게 무한 반복했다. 그 ’아가‘가 윤씨 집안의 장손이며, 이름은 윤아무개이고, 이제 막 아장아장 걷기 시작해서 달려올리 없다고 아무리 말해도 듣고 싶은 것, 보고 싶은 것만 보는 할머니에겐 아무 의미가 없는 정보일 뿐일 터였다. 당고모가 우리 먹으라고 깎아놓은 사과니 배니 귤 등을 끊임없이 집어드시던 할머니를 보다 못한 아빠가 기어이 접시를 멀찍이 치우라 했고, 식사하고 요거 한잔 꼭 찾으신다며 당고모가 타온 믹스 커피 한잔을 달게 비운 할머니는 다시 텅빈 눈이 되어 졸리워하셨다. 돌아누운 할머니에게 인사를 하고 나오며 생각했다. 이제는 할머니의 시간도 공간도 그녀 주위의 사람들의 관계도 모두, 한그루 나무에서 뻗어나온 뿌리처럼 뒤죽박죽 얽히고 설키어, 할머니는 그때그때 내키는대로 가장 보고 싶은 장면만 꺼내어 오래오래 들여다보고 있다는 걸.      




용인집에서 마을 사람들과 교회 공동체 사람들이 단체로 김장을 한 날, 할머니도 들여다보고 김치도 가져올 겸 들렀던 아빠는 다음날, 엄마가 얼추 손을 봐 할머니 것과 비슷하게 만들어놓은 김칫속과 알맞게 절여진 알배추, 그리고 굴 한접시를 앞에 두고 실감했을거다.

이제는 다시는 할머니의 김장 김치를 먹을 수 없다는 것을.      


그리고, ’석화가 아니었어‘ 로 시작한 아빠의 이야기를 들은 지금, 나는 안다.

어제 점심 밥상에서의 그 ’해프닝‘은, 눈치도 염치도 없이 마나님이 정성껏 차려준 밥상 앞에 앉은 ’먹깨비 노인‘의 유치한 반찬 투정이 아니라, 이제는 평생을 함께 산 큰아들인 자신조차 알아보지 못하는 노모의 다시는 보지 못할 밥상에 대한 그리움이었다는 걸.

쏜살같은 세월을 이르는 중에, 내가 제일 좋아하는 표현이 있다. 우리 아빠가 한 말이다.  

’세월이..방금 닫고 나온 문 같다.‘

아빠의 닫고 나온 문 뒤에 남은 사람들이, 문 앞의 사람들보다 점점 많아지는 노년의 회한과 그리움...

이제는 이룰 수 없는 꿈이 되어 버린 그것들에 대한 낮은 탄식 같은 것이었음을.

뭐... 그런게 아니었을까...싶다...
 

김장 김치 속이 다 익어버리기 전에 이번 주말엔 수산시장에 가서 석화나 좀 사와야겠다. 할머니의 밥상은 이젠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 되었지만 김장김치에 얹은 제철 석화 한 입쯤은 아직은 꿈꿀 수 있을 테니 말이다.            

         




p.s.  글을 쓰면서 새롭게 알게 사실. 굴과 석화는 사실 같은 것이라고 한다. '굴'의 한자표기가 '석화'인데 그냥 사람들이 의례히 껍데기 없는 봉지굴은 양식굴이라 하고, 껍데기 붙은 건 자연산 석화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게 그거라는.  크기 차이는 있겠지만 봉지굴도 석화인데, 아마 엄마가 그날 마트에서 사온 봉지굴은 알이 좀 굵은 품종이었던 듯... 사전적인 의미는 그렇다 쳐도. 나 역시 아빠처럼 왠지 석화가 더 달고 고소하고, 자연산일 것만 같다. 암. 그래야 제맛이 아닐까....





* 이 글은 지난 글에 이어지는 글이므로, 함께 보면 더 이해가 잘 되실 듯 하여, 지난 글을 붙여봅니다.

지나치게 긴~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https://brunch.co.kr/@younhana77/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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