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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아 Nov 25. 2024

머릿결이 닮았네

소셜 말고 소설  <두 여자 2>


이 글은 전혀 '소셜'하지 못한 내가 '그냥 문득 필받아' 소소하게 쓴 '소설'이다. 핍진성과 개연성을 망가뜨리지 않고 온전히 이야기를 만들어 낼 비상한 글쟁이의 재주는 내게 없는지라,

아무래도 보고 겪은 일이 소재가 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나는 이 글을 일단은 '소설' 이라 부르겠다. 그래야, 가끔 내 브런치북을 보고 '지랄한다' 혀를 차는 엄마의 지청구를 피해, "이거 다 지어낸 얘기야. 허구라고 허구!!" 라고 박박 우기며 도망갈 구멍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는 완전히 허구도, 그렇다고 온전히 진실도 아니다. 다만, 쓰는 이와 읽는 이의 마음에 따라 그 사이 어디쯤에 존재하는 그런 '소소한 이야기' 이니, 그저 하늘 아래 이런 두 여자가 있구나..그럴 수도 있겠네..정도로 읽히기를 바란다. 몇편까지 이어질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할머니는 키가 작았다.

키만 작은게 아니라 얼굴도 작고, 손도 작고, 어깨도 작고, 체구 자체가 작아서 멀리서 보면 초등학교 4학년 정도의 여자아이로 보였다. 심지어 눈,코,입도 하나같이 작아서 죄다 오종종하기만 한 이목구비가 그닥 눈길을 잡아끄는 미인은 결코 아니었다.


그 시절 ‘30대 이상 엄마들의 국룰’ 같았던 짧은 뽀글파마 머리를 한 쪼그만 할머니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촌할매'가 아닌 '세련된 서울 할머니'로 보였던 건, 유난히 뽀얗고 깨끗한 피부 덕분이었다. 할머니는 특별히 화장품을 바르지 않는데도, 또래의 할머니들에 비해 살결이 맑고 주름이 적었다.      


반면에, 엄마는 예뻤다.

모든 아이들은 대략 6살 정도까지는 자기 엄마가 세상에서 제일 예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시기가 지나고 객관적 판단이 가능한 나이가 된 후에도 내 눈에는, 아니 나뿐 아니라 다른 사람 눈에도 엄마는 ‘객관적으로’ 미인이었다. 쌍꺼풀 짙은 눈에 오똑한 코, 한국인 평균치보다 아주 살짝 큰 입 때문에 활짝 웃을 때의 엄마는 외국의 배우를 연상케했다.  


나중에는 보기 싫다고 빼기는 했지만 원래는 뺨에 볼록하게 돌출된 작은 두 개의 미인점이 있었는데, 그조차도 흉하지 않고, 마릴린 먼로의 입술 위 매력점처럼 엄마의 미모를 돋보이게 했다. 엄마는 내 유년시절이 지나고 대학에 갈 때까지 꽤 오랫동안, 다른 엄마들같은 뽀글 파마머리가 아닌 엄마의 트레이드 마크 ‘생단발머리’을 유지했다.     


엄마, 아빠의 오래된 앨범 낡은 사진 속. 나팔 청바지에 올이 굵은 니트로 짠 조끼를 멋스럽게 받쳐 입고 머리 위에 얼굴 크기 반만한 썬글라스까지 척, 걸쳐 쓴 앳된 여대생 엄마는 긴 생머리였다. 사람들이 젊은 시절의 엄마를 ‘못잊어 생각이 나겠지요’를 열창하던 가수 김상희를 닮았다고 해서, 유튜브로 과거 영상을 찾아봤는데, 내가 보기엔 엄마가 더 예뻤다. 그러나, 예쁜 엄마는 사내아이나 혹은 엄마를 닮은 딸에게나 축복일지 모른다. 나는 똑똑하고 예쁜 엄마가 좋고 자랑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론 그 사실이 싫기도 했다. 나는 엄마를 하나도 안 닮았기 때문이었다.     

나랑 엄마랑 길을 나서면, 사람들이 여지없이 한다는 소리가 “아유, 너는 아빠 닮았구나.”였고, 그 말은 곧 ‘너는 엄마를 안 닮아서 안됐구나’ 라는 뜻인 걸 아는 나는 그만 기분이 나빠지곤 했다.


세 고모 중 첫째, 둘째 고모는 할머니가 낳은 자식이 아니니 확인할 길이 없지만, 아빠는 할머니를 쏙 빼 았는데, 셋째 고모와 삼촌은 달랐다. 눈이 부리부리하고 코가 오똑하고 갸름하니 하관이 가파른게 누가 봐도 ‘종자가 달라’ 보였다. 아빠가 중학교 1학년 때 돌아가셨다던 할아버지를 나는 한 번도 본 적은 없지만, ‘그 시절 드물게 170센티가 넘는 키, 어디 하나 죽은 데 없이 반듯한 이목구비에, 솟을 바위처럼 우뚝한 콧날’을 가진 양반이었다는 할머니의 회상이 아니어도, 셋째 고모와 삼촌의 ‘종자가 다른’ 이목구비를 볼 때마다 할아버지의 모습이 충분히 짐작 가능했다.


나는 '하필이면' 할머니를 닮은 아빠와 예쁜 엄마 사이에서, '하필이면' 아빠를 닮은 딸로 태어난 나의 ‘대를 이어 겹겹이 재수없는 미인 유전자 사다리 타기’결과에, 번호 한끝 차이로 당첨되지 못한 복권을 뽑은 듯 두고두고 속이 쓰렸다.     

 

발가락까지 아빠를 닮은 내가 유일하게 엄마를 닮은 건, 머릿결이었다. 모발이 명주실처럼 가늘고 얇아 찰랑찰랑하긴 하지만, 좀처럼 파마가 먹지 않는 엄마의 참생머리는 엄마가 오래도록 뽀글파마를 하지 않고 단발머리를 유지하게 했던 이유이기도 했다. 아침에 내 머리를 묶어줄 때마다 엄마는 “우리 딸은 엄마를 닮아서 참머리야.” 이 말을 꼭 했는데, 어쩌면 엄마 역시 자신을 닮은 구석이 하나도 없는 딸이 아쉬워 일부러 더 ‘엄마 닮은 참머리’를 강조했나 싶기도 하다. 엄마를 ’똑닮은‘ 내 머리카락 역시 모발이 가늘고 미끌거려 머리를 땋아도 힘없이 풀리기 일쑤여서 엄마는 명절에 한복을 입을 때나 하는 땋은 머리를 자주 해주곤 했다. 정수리 가르마 바로 옆에서부터 가닥가닥 머리를 잡아 종종종 땋아 내려오는 이걸, 엄마는 ‘깃땋은 머리’ 라고 불렀다. 훗날 그걸 ‘디스코 머리’라고도 한다는 걸 알았지만, 나는 여전히 사극 드라마 등에서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처녀들의 머리를 볼때마다 ‘아, 깃땋은 머리네...’ 하곤 한다. 포니테일로 질끈 묶기도 바쁜 아침, 다른 머리 땋기보다 시간이 배로 걸리는데도 엄마는 “우리 딸 머리는 이래야 이쁘다” 며 정성을 들였고, 등을 돌린 채 엄마 무릎 사이에 앉은 나는 ‘엄마를 닮아 참머리’라는 소리가 듣기 좋아서 지각하게 생긴 날에도 발음하기도 힘든 ‘깃딴 머리’를 해달라고 졸랐다.      


여동생 꼬임에 넘어가 큰오빠 몫의 포도송이를 몇알 더 뜯어먹다 걸려 손들고 서있었던 게 어린 시절 기억 속의 유일한 일탈이었을 정도로, 부모 속 한번 안썩이고 내내 모범생이던 엄마는 명문대 영문과에 턱하니 합격해서 서울로 유학간 자랑스런 딸이었다. 그런  엄마가 난생 처음 부모님 말씀을 거역한 건, 아빠와의 결혼이었다. '너는 이제 내 딸이 아니다' 라는 외할머니의 반협박도 불사하고 감행한 결혼이었다.      

신혼 여행을 다녀오니, 세 고모가 할머니와 당시 대학생이던 삼촌까지 앞세우고 서슬 푸르게 들이닥쳐 '모셔가라' 했단다. 협의는커녕 일언반구 사전 고지도 없던 그 일방적이고도 폭력적인 통보에 불평 한마디 없이, 엄마는 무표정한 얼굴로 “네.” 라고 했다고 한다.


먼 훗날, 그날의 엄마보다도 훨씬 나이를 먹은 내가 어떻게 그때 그럴 수 있었냐고 물었다. 엄마는 그 결혼을 지켜내는 것 만이, 난생 처음 어머니를 거역하고, 큰 딸이라면 ‘동지 섣달 꽃본 듯’이 귀애하던 아버지의 가슴에 대못을 박은 스스로를 용서하고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는 일이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 말을 할 때, 나는 엄마랑 나란히 누워있었기 때문에 엄마의 표정을 보지는 못했지만, 수십년 전  무표정으로 담담한 척 하던 얼굴 뒤에서 어쩔 줄 몰라하던 황망한 표정의 젊은 엄마가 보이는 듯 했다.   


예쁘고 똑똑한 엄마는 내게 고 싶은 롤모델이자 선망의 대상이었다. 상대방은 전혀 모른채 나 혼자 정한 라이벌이었다.  어릴 적의 나는, 그렇게 ‘완전무결'해야만 하는 엄마가 도덕책의 ’노인 공경‘ 단원에서 배운 모습과는 딴판으로 할머니에게 데면데면한 모습이 무람했고, 좀 더 나이가 들어서는 엄마를 힘들게 하는 할머니가 미웠다. 그렇지만 일하는 엄마의 부재시에 나를 돌봐주고 키워준 할머니에 대한 애정도 있었기에, 할머니에 대한 미움은 왠지, 가지고 있어서는 안되는 무언가를 품고 있는 불편한 느낌이었다.


그렇게 45년의 동거가 시작되었다. 45년 간 지속될 줄 미리 알았어도, 그때의 젊은 엄마는 그렇게 담담하게 네. 할 수 있었을까... 45년은... 생각보다 긴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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