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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잔향 16화

실망의 역사

by 이제이

어릴 적

산타 할아버지에게 편지를 썼다

로봇 장난감을 고르고

구체적인 모델명까지 적었지만

양말 속엔

모나미 색연필 한 세트가 들어 있었다


그다음 해엔

소풍날 비가 와서

엄마가 싸준 김밥을

교실 책상 위에서 먹었다

마시는 우유까지 따뜻해서

그날의 즐거움도 눅눅하게 젖었다


첫 시험에서

‘잘 볼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는데

막상 받아 든 성적표엔

빨간 줄 하나가 조용히 웃고 있었다


생일엔 친구들이

온다고 해놓고 안 왔고

좋아하던 선생님은

어느 날 갑자기 전근을 가셨다.

친해진 아이는

또 다른 친구와도 금세 친구가 되어버렸다.



실망은

큰 사건이 아니었다

늘 기대했던 만큼,

혹은

기대하지 않아도 조용히

찾아오는 일상의 기척이었다


그 실망들이 모여

나를 무디게도 만들었지만

가끔은 어렴풋이

단단하게도 만들었다


그때 그 색연필로

처음으로 편지를 썼고

비 오는 소풍날

창밖을 보며 시를 적기 시작했으며

빨간 줄 옆에는

"다음엔 꼭 웃자"라고 써두었고


그리고 어느 해 생일,

초는 켜졌지만

박수는 없던 그 조용한 방에서

나는

촛불 대신 마음을 불었다


작지만 꺼지지 않는 내 쪽불 하나가

그때부터 나를 비추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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