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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과 임신, 임신과 일-1

track01 - 아이유 <마음>

by 마요

https://www.youtube.com/watch?v=he2C4lx63M0

툭 웃음이 터지면 그건 너
쿵 내려앉으면은 그건 너
축 머금고 있다면 그건 너
둥 울림이 생긴다면 그건 너




임신을 시도한지 딱 1년째였다. 이쯤하면 우리도 난임병원을 가서 뭐라도 시작해보자던 차였다. 하필 내가 새로운 프로그램에 메인 PD로 발령받아 거나한 환영 회식을 한 다음 날, 나와 남편은 몇달 전 예약해둔 난임병원에 갔다. 숙취가 채 가시지 않은 이른 아침이었다.

본격 진료 전 지난 몇달간의 생리일자 등을 써내는 문진표를 작성했다. 간호사 선생님은 속으로 날짜를 계산하더니 고개를 갸우뚱하시며, 임신 테스트해보셨냐고 묻는게 아닌가. 그러고보니 지난달까지는 매달 그렇게나 테스트기를 해댔는데 이번달은 테스트를 해본적이 없었다. 이번달엔 난임병원을 예약해뒀으니까-하는 생각뿐이기도 했고 애초에 어플상으로 아직 테스트를 할 만한 날짜가 아니었다. 아니요- 했더니 일단 소변검사를 해보자 하셨다.


그렇게 우리는 생전 처음 난임병원에 간 날, 임신의 여신이 있다면 저렇게 생겼으리라 싶은 인자한 미소의 선생님에게서 “임신이신데요? 축하드려요!” 라는 말을 들었다. 4주도 채 안된 날짜에 빨리 알게된 임신 사실. 어안이 벙벙하고 실감이 안났다. 바로 몇 시간 전까지 회식으로 많이 마신 술도, 새 프로그램에 적응하느라 요며칠 심하게 받은 스트레스와 압박감도 걱정이 됐다. 그래서 마냥 기쁘기 보단, '아니 여기 난임병원인데, 간호사님이 아까 너무 큰 목소리로 다 들리게 양성이세요-라고 하신거 아냐?' 그런 남의 눈치가 더 신경쓰일 정도였다. 하나도 실감이 안났다. 그렇게 얼떨떨한 상태로, 다음주에 앞으로 다닐 병원을 정해 초음파를 보면 된다는 이야기를 듣고 집에 왔다. 기분탓인지 졸음이 쏟아졌다.


그리고 일주일 뒤, 작년 이맘 때 쯤 임신 준비를 시작하며 산전검사를 받았던 동네 병원을 1년만에 다시 찾았다.

선생님은 아기집이 잘 있다며 2주뒤에 오면 아기도 보이고 심장소리를 들을 수 있을거라 하셨다. 진료가 끝나자 내 손 위에는 아직은 까만 점같이 생긴 아기집이 보이는 초음파 사진, 임신 확인증, 산모수첩 같은 어마어마한 물건들이 주어졌다. 비로소 실감이 나고 우스워서 병원을 나와 남편과 둘이 실실거리며 웃었다. 우리는 병원 앞 분식집에 가서 오므라이스와 라볶이를 사먹었다. 투박한 비주얼의 오므라이스가 너무 맛있어서 기분이 좋았다. 뭔지 모르게 홍콩 음식 같다고 같이 낄낄거렸다. 또 집에 오니 견딜 수 없는 졸음이 쏟아졌다.

“오빠, 0.3cm 면 3mm니까 요만한건데, 이게 뭐라고 배도 땡기고 졸리고 그럴까?” 했더니 남편은,

“그것보다 더 작은 돌이 신발에 굴러 들어와도 그렇게 신경쓰이고 아픈데, 그 아기가 뱃 속에서 자라겠다고 세포분열을 하고 그러는데 어찌 안 그러겠어” 그랬다. 맞아, 진짜 맞는말이야.


아직은 일과 임신 두가지를 함께 생각하게 되면 걱정이 앞서고 두려우면서도 당장 아기에게 미안한 감정이 든다.

“일을 누구보다 잘해내고 싶어, 나도 함께 일하는 사람도, 그리고 이걸 TV로 혹은 유튜브로 보는 사람도 만족할만한 결과를 만드는 사람이 되고싶어”

와 같은 나의 마음들이, 어쩌면 너에 대한 사랑에 반(反)하는 일인것만 같아서, 그게 아닌줄을 나도 알지만 괜시리 마음이 불편해서, 눈물이 찍 나버리는건 왜일까. 자꾸만 내 마음 속에서는

<좋은 엄마가 될 수 있을까> ⭤ <다음주면 입덧이 시작된다고 했는데 나 앞으로 일 하는데 문제없을까>

이 두 가지 서로 다른 걱정들이 뒤섞여 마음을 어지럽힌다.


구체적으로는 이런 문제다.

곧 임신을 했다고 회사에 알리면 회사는 임산부의 시간 외 근로지침 규정에 따라 야간근무를 금지시킬 것이다.

근로기준법상 모성보호 규정은 다음과 같다.

제70조(야간근로와 휴일근로의 제한)

임산부를 야간(22시~06시) 및 휴일에 근로시키지 못한다. 다만, 고용노동부장관의 인가를 받으면 그러하지 아니하다.

⇒ 상기 규정 위반시 벌칙 : 2년 이하의 징역 또는 2천만원 이하의 벌금

(고용노동부 장관의 인가? 그런걸 진짜 받는 사람이 있는지도 모르겠거니와 저 '벌칙'이라는 글자조차 어색하게 느껴진다. 런닝맨에서나 듣는 단어 아니냐..)


하지만 내 직업은 방송PD다. 그중에서도 예능PD. 지금껏 10년간 밤을 새지 않고 일한 프로그램은 없었다. 그나마 지금 맡게된 위클리 음악방송은 레귤러한 루틴이 있어 밤샘이 덜하지만 그럼에도 생방송 당일 음방PD의 밤샘은 구조적으로 피할 수 없다. 사전녹화와 무대 셋업, 아이돌의 스케줄 때문. 그런 밤을 셀 수 없이 보내온 나에게, ‘이젠 밤샘이 안 된다’는 건 연출이라는 정체성 자체를 흔드는 말이었다.

입사 초, 엄마는 매번 나에게 "왜 밤을 새? 낮에 미리 좀 해두면 안돼?" 하고 묻곤 했다. 10년이 지난 지금도 그 질문은 별 소용이 없다. 예를 들어 에스파가 컴백을 했다 치자. 컴백주의 에스파의 일정이란, 수요일 밤엔 엠카 사녹을 목요일 밤엔 뮤뱅 사녹을 금요일 밤엔 음중 사녹을 토요일 밤엔 인가 사녹을 하는 것이 소위 <국룰>이거늘. 무슨 수로 내가 “에스파 여러분, 제가 임신을 해서 밤을 못새서 그런데 이번엔 특별히 다른 날짜 낮 시간에 별도 사녹 가시죠” 라고 하겠는가? 뿐만 아니라 전 스탭의 스케줄을 맞출 자신도, 2배로 발생할 스튜디오 대관비부터 시작해 각종 시스템 비용, 인건비 일체를 감당할 제작비도 없다. 오직 담당 피디가 임신했다는 이유만으로..!


그러니 스멀스멀 내 마음속엔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글쎄.. 격주에 하루, 그 정도는 밤을 새도 할만하지 않을까? 어쩌면 임산부가 제 역할을 해낼 수 있는 유일한 프로그램일지도 모르는데? 마침 내가 이 프로그램을 맡게됐는데 임신을 하다니, 오히려 행운인게 아닐까?


생각이 이까지 다다랐을때, 나는 고개를 숙여 내 배를 본다.

아가야 미안해. 이 고민들에 너가 없어서 미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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