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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결임 Sep 08. 2024

3화

분명히 내가 봤는데. 그 애의 얼굴을, 멸치 대가리의 진짜 얼굴을 봤다. 분명하게 보지는 못했지만 분명히 봤다. 그건 인간의 머리였다. 멸치가 아닌 진짜 인간의 머리. 그런데 그 애가 뒤를 돌아서자 얼굴이 아닌 멸치 대가리가 날 빤히 보고 있었다. 반짝이는 멸치 눈과 함께. 내가 '벗었다'는 표현을 쓴 것과 달리 멸치 대가리는 멸치 대가리를 벗지도, 쓰지도 않았다. 사라졌다, 다시 나타날 뿐이었다. 그럼에도 '벗었다'는 표현이 이상하게 더 어울렸다. 그야 멸치 대가리는 멸치 대가리니까. 인간일리가 없을 테니까. 멸치 대가리는 멸치 대가리고 그것을 인간의 머리라고 부를 수는 없을 테니까. 어, 근데 이상하다. 분명 봤는데. 그 애가 날 향해 뻐끔거렸다. 뻐, 끔, 뻐, 끔. 뭔가 내게 말을 는 것처럼 보였다. 나? 나한테 말하는 게 맞아? 주위를 둘러보아도 도서실엔 멸치 대가리와 나뿐이었다.

뻐, 끔, 뻐, 끔. 뭐? 뻐, 끔, 뻐끔. 뭐야. 뭐라고 하는 거야. 이봐, 난 육지의 언어를 쓴다고. 쥐가 날 것 같았지만 쥐 나지 않은 다리를 움직여 앞으로 다가갔다. 그 애는 육지 사람과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걸 망각한 듯 여전히 날 향해 뻐끔거리고 있었다. 나는 팔만 뻗으면 닿을 거리에 멈춰 섰다. 그 애는 가뜩이나 왜소하고 좁은 어깨를 더욱 움츠렸다. 찬찬히 얼굴을 뜯어봐도 멸치 대가리는 여전히 멸치 대가리다. 아까 봤던 얼굴은 어디로 간 거지?



넌 뭐야? 진짜 인어야?



내 물음에도 그 애는 열심히 뻐끔거리기만 했다. 어깨를 잔뜩 움츠린 채 뻐, 끔, 뻐, 끔. 시끄러워. 들리진 않지만 시끄럽다고. 귓가에 방울 소리가 터지는 것처럼 귀가 먹먹했다. 고민 없이 한쪽 손을 들었다. 얼굴을 한번 건드려볼까? 내 손에 생선의 촉감이 어루만져질까 궁금했다. 어제저녁 반찬으로 나온 고등어 생선이 떠올랐다. 문득 멸치 대가리가 고개를 들어 허공을 바라봤다. 예비 종이 울리는 소리였다. 종소리에 자동 반사된 듯 그 애는 몸을 튕겨 날 비집고 급하게 도서실을 나갔다. 빠르게 뛰어가는 멸치 대가리의 왜소한 등이 문에서 사라졌다. 정체를 들킬까 두려운 모양새였다.



교실 문을 열자 반 애들의 시선이 내게 꽂혔다. 하나, 둘, 눈알이 대체 몇 개야. 앞을 보니 멸치 대가리는 원래 거기 있었다는 듯 아무렇지 않게 책상에 앉아있었다. 죄송합니다. 살짝 목례를 하자 선생님이 얼른 앉으라며 손짓을 했다. 잠깐 끊겼던 소음이 다시 시작됐다. 자리로 직진하면서 멸치 대가리의 뒤통수를 쏘아봤다. 여전히 멸치 대가리 그대로다. 그 애가 멸치 대가리를 벗었던 것, 내게 말을 하듯 뻐끔거렸던 것들이 계속해서 재생됐다. 내가 헛것을 본 건가. 열사병에 걸리기에는 아직 이른 날씨인데. 이마에 손을 댔더니 열은 나지 않았다. 짝꿍은 교실을 나가기 전 그대로였다. 부지런히 무언가를 끄적이고 있었다. 끄적끄적.



그래, 어쩌면 그 애는 변신을 할 수 있는 걸지도 모른다. 인어에서 사람으로, 사람에서 인어로. 나는 확신했다. 그 애가 다른 세계에서 온 존재일 거라고. 바다라는 세계가 아닌 또 다른 차원의 세계일 수도 있겠다고. 아직 대화를 나눠보진 않았지만 눈빛만으로도 나는 알 수 있었다. 알 것 같았다.

곧 있으면 점심시간이었다. 그런데 인어는 무얼 먹지? 육식을 하나? 급식실에서 그 애를 본 기억은 없었다. 수업이 끝나기 전에, 점심시간이 시작되기 전에 새 공책을 꺼냈다. 그리고 그 애에 대한 목록을 만들었다. 알고 싶었다. 내가 알고 싶은 것과 그것을 확인할 방법에 대해 써 내려갔다. 궁금했다. 내가 누군가에게 이렇게까지 호기심을 느낀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동물 사육장 같았던 초등학교, 진흙탕 싸움 같았던 중학교 시절이 떠올랐다. 그래, 그래. 그때 이후로 처음인 것 같다. 혼자 다니기 시작한 것도 그날 이후였나. 내가 알던 동물의 왕국은 더 이상 없었다. 대신 멸치 대가리가 있었다. 이제 애들의 새로운 먹잇감은 멸치 대가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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