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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결임 Sep 14. 2024

학교 도서실은 사람이 잘 다니지 않아 쾌적한 곳이다. 매일 가고 싶은 욕망을 눌러 담고 매월 정해진 날짜에만 가고 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어지기 때문인데, 내가 매일 자리를 비우면 삼인방이 날 쫓아올 것이고 기어코 이곳을 찾아낼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된다면 나만의 쾌적한 비밀 공간을 내 손으로 없애버리는 꼴이 되고 만다. 그것만은 절대 막아야 했다. 삼인방은 먹잇감을 한번 물면 절대로 놓지 않는 습성이 있어 첫째도 조심, 둘째도 조심해야 한다. 삼인방의 눈에 띄지 않게 조심하며 걸음을 재촉했다. 도서실에 가까워질수록 생기가 느껴졌다.

정렬하게 꽂힌 책들을 보자 숨이 맑게 트이기 시작했다. 사랑스러운 나만의 힐링 공간. '나만의'. 나를 괴롭히지도, 빨리 하라며 구박하지도 못하는 장소. 물 만난 생선처럼 숨을 들이쉬었다가 내쉬었다. 들이쉬었다가…… 스읍, 내쉬고…… 후우. 창문 틈으로 바람이 새어 들어와 오래된 책 냄새가 번졌다. 어서 오라고, 계속 나를 기다렸다고 반기는 것 같았다.

도서실은 바깥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곳에서만큼은 빨리빨리의 공식이 먹히지 않는다는 건데 그 말인 즉, 쉬는 시간 10분을 1시간처럼 쓰는 게 완전 불가능하지는 않다는 말이다. 느긋하게 책을 볼 수도, 사색에 잠길 수도 있었다. 휴우, 10분이면 충분했다. 여유를 가지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기세등등하게 항상 굽어있던 허리를 폈다.



자, 그럼 어딜 먼저 둘러볼까. 항상 가던 책장에 눈길이 갔다. 아직 내가 보지 않은 판타지 소설이 있었나. 판타지 장르는 내 현실을 잊게 해 줬다. 별 볼 일 없었던 인간이 사실은 최강 마법사라거나, 평범했던 삶을 벗어던지고 위대한 여정을 떠난다거나 하는 내용들은 언제나 날 설레게 했다. 나에게 상상할 거리를 안겨주었다. 만약 이세계 공주가 나타나 내가 영웅이 될 운명이니 자기 왕국을 위해 도와달라는 소릴하면 어쩌지? 히죽 웃으며 상상의 나래를 펼치던 중에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곧바로 현실로 복귀하면서 불안감이 엄습해 왔고 동시에 목 뒤가 쭈뼛 섰다. 아, 이런……. 대체 누굴까? 보통 아침 시간에는 도서실에 잘 들리지 않던데. 제발 삼인방만 아니어라, 제발……. 이번엔 또 어떤 껀덕지로 날 못살게 굴지 몰랐다. 제발 날 좀 내버려 둬. 제발. 최악의 시나리오를 상상하며 천천히 뒤돌자 실루엣이 보였다. 잠깐 동안은 문 앞에 서 있는 게 사람인지, 귀신인지, 마네킹인지 분간이 안 갔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가 조용히 바람에 흩날렸다. 자세히 보니 사람인 것도 같았다.



무, 슨 일, 이야?



혀가 꼬여 말이 헛나왔다. 어쩌자고 이런 멍청한 질문이 나왔지. 학교 도서실이 내 것도 아니고 저쪽에서 도서실에 책 보러 왔지 뭐 하러 왔겠느냐고 반문한다면 딱히 할 말도 없었다. 내가 유일하게 숨 좀 쉴 수 있는 공간이라고 해서 오로지 나만 쓸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무슨 말이 돌아올까 긴장하며 제자리에 서 있었다. 그러나 여자애는 바람에 살랑이는 머리를 신경 쓰지도 않고, 그렇다고 내 말을 들은 것 같지도 않고,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거리를 좁혀왔다. 어어, 왜 이래. 달큰한 냄새가 후각을 자극했다.



너 얼굴이……?



내 얼굴이 왜……? 반사적으로 얼굴에 손이 갔다. 삼인방이 내 얼굴을 가지고 놀린 적은 있어도 이 여자애는 놀리려고 꺼낸 말이 아닌 것 같은 게, 굉장히 진지한 얼굴로 진지하게 물었기 때문이다. 미간을 보니 장난 비슷한 무엇도 아닌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그게 무슨 말이냐고 나도 진지한 목소리로 진지하게 되물었다. '너 얼굴이……?'라는 게 무슨 소리지? 뒤에 점점점 물음표는 뭐지? 얼굴이 있으니 얼굴이 있겠지. 얼굴 없는 얼굴이 있을 리가 없잖아. 내 얼굴이 이상하게 생겼다는 뜻인가? 아니면 뭐가 묻었나? 얼굴을 문질렀다. 아무것도 묻어 나오는 게 없었다. 뜬금없이 찾아와 의미 모를 말을 해놓고선 해명도 없었다. 여자애는 알 수 없는 존재였다. 여자애가 알 수 없는 게 아니라 이 여자애가 알 수 없었다. 어제도 뜬금없이 말을 걸었고 오늘도 뜬금없이 말을 걸고 있었다. 여자애의 검은색 삼선 슬리퍼가 내 발끝 바로 앞에 섰다. 가 깝 다. 왜지? 여자애가 중얼거렸다. 왜냐니. 내가 묻고 싶은 말이었다. 갑자기 현기증이 나고 어지러웠다. 땀이 삐질 새어 나왔다.



근데 왜 지금은…….



여자애 말이 끝나기도 전에 종이 울렸다. 1교시 수업에 늦지 않으려면 종소리가 끝나기 전에 교실로 올라가야 했다. 여자애와 닿지 않도록 최대한 오장육부를 비틀어 도서실을 빠져나왔다. 종소리는 이미 끝난 지 오랜데 1교시 수업은 시작될까 봐 불안했다. 빨리빨리, 헉헉. 하나, 둘, 셋. 빨리, 헉, 빨리. 셋, 둘, 하나. 헉헉. 숨이 차올랐다. 이런 적은 결코 없었는데. 그 여자애와 있으니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이 한꺼번에 밀려온 느낌이었다. 그렇다면 얼마동안 바보같이 서 있었던 거지?

자, 인사. 안녕하세요. 반장의 우렁찬 목소리를 들으며 생각에 잠겼다. 눈치채기 전까지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심지어 아무런 낌새도 느끼지 못했다. 시간이 멈춘 것 같던 이상한 그 느낌. 뒤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뒤이어 얼른 앉으라는 선생님의 목소리도. 뒤통수가 따가웠다. 펜을 떨어뜨린 척 책상 밑으로 고개를 숙여 슬쩍 뒤를 돌아봤다. 그 여자애였다. 그 여자애가 고양이 같은 눈으로 날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다시 목 뒤가 섬찟해졌다. 허리를 세우고 땀을 닦으며 교과서를 내려다봤다. 내 몸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게 아니고선…… 왜 이렇게 심장이 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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