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그저 수많은 날들 중 하나일 뿐이다. 별다를 거 없는 하루. 그러니 아무렇지 않게 평소처럼 하루를 마저 보내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 내가 왜 이러고 있지? 내 몸은 이미 도서실로 뛰어가고 있었다. 점심시간이 곧 끝나갈 텐데 지금 이래도 되는 걸까? 몰라, 그냥 다 때려쳐! 지금 그깟 일 하나 때문에 이제껏 지켜온 모든 걸 포기하겠다고? 아니야, 포기하는 거 아니야! 웃기지 마, 너 그거 포기나 다름없는 거야. 아니야, 아니라고! 하! 그럼 엄마 얼굴은 어떻게 볼 건데? 모, 몰라. 내신은? 수능은? 대학은? 몰라, 몰라, 몰라. 그럼 도서실은? 일부러 자주 가지도 않고 참았으면서 하루 만에 다 무너뜨리겠다고. 몰라, 몰라, 몰라, 몰라, 몰라! 모른다구! 여러 개의 자아가 생채기를 내며 할퀴어댔다. 나도 몰라. 모른다고. 눈앞이 흐려졌다. 숨쉬기도 불편하고 언제까지 달려야 하나 알 수 없어서 불편하고 호흡이 가빠져서 불편하고 다리가 어묵마냥 흐물텅거려서 불편하고 이러는 와중에 수업 종이 치지 않을까 걱정돼서 불편하고 그냥 지금 이 모든 상황이 다 불편했다. 꼴에 남자라고. 꼴에 여자 앞이라고 지금 이렇게 과민반응하나? 그러니까 이건 그냥 수많은 평소 중 하나일 뿐인데.
정신 차려! 니가 뭔데. 허, 니가 아주 미쳤구나. 니가 뭔데. 당장 돌아가. 니가 뭔데. 당장 교실로 돌아가서 책상 앞에 엉덩이 붙이라고. 니가 뭔데. 곧 있으면 수업 종 칠 텐데? …니가 뭔데. 이제는 아주 그냥 막 나가는구나, 막 나가. ……. 니가 자존심 챙긴다고 될 문제인 줄 아니? ……. 잘 들어. 넌 그냥 먹잇감이야. 먹이사슬 최하층 멸치새끼일 뿐이라고! ………….
알아, 안다고. 알고 있다고. 잠깐만이라도 잊고 있으면 안 되나? 내 위치가 어딘지는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인정하기 싫었을 뿐이라고……. 어서 오세요, 먹이사슬 최하위 층에. 만약 내가 유튜브를 한다면 이렇게 어그로를 끌어도 되지 않을까. 말도 안 되는 상상이 소리소문 없이 내 뇌 속에 스며들었다.
오호홋, 오늘은 먹이사슬 최하위 층에 계신 멸치씨를 만나 뵙겠습니다! (관중들의 환호소리) 하하, 안녕하세요, 멸치입니다! (패널과 관중들의 박수소리) 그러고 보니 멸치씨는 왜 멸치인가요? 아하하, 멸치를 닮아서 멸치라고 불립니다. (관중들의 웃음소리) 어머나, 정말 멸치를 닮으셨네요! 자, 다들 멸치를 닮은 멸치씨께 다시 한번 박수 주세요! 와아아! (관중들의 박수소리) 그렇다면 멸치씨. 어쩌다 여기에 오게 되셨나요? 흐음, 그것 참 철학적인 질문이네요. 오호홋, 그런가요? 뭐, 우선 저는 학창 시절에 항상 멸치라고 놀림을 받곤 했었습니다. 어머, 학교폭력을 당하셨다니! 정말 안 되셨네요. (관중들의 안타까워하는 소리) 아니에요, 아니에요! 오히려 시련을 극복하는 데 아주 큰 힘이 되었습니다. 세상에, 멸치씨는 정말 듬직하고 아량이 넓으시군요! 저, 사실 멸치씨를 사랑하고 있어요! (관중들의 놀라는 소리) 후, 알고 있었습니다. 네에? 저, 정말인가요? 후우…… 그렇습니다. 그, 그렇다면 제 마음을 받아주실 건가요? 그래요. 좋습니다. 사귑시다! (극적인 배경 효과음과 관중들의 환호 섞인 박수소리)
뭐 하는 거야?
느닷없이 들려온 목소리에 상상이 깨졌다. 주위를 둘러보니 도서실 문 앞 복도 한복판에 서 있는 나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목소리의 주인공과 함께. 수치심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이딴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다니! 이딴 말도 안 되는 상상하는 걸 남에게 들키다니! 연이어 교실에 있었던 수치심도 밀려왔다. 그 여자애에게 괴롭힘 당하는 모습을 보여주다니! 멸치 도시락을 먹는 내 모습을 삼인방이 봐버렸다니! 그 여자애를 버려두고 도망쳐오다니! 후끈후끈.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게 느껴졌다. 아마 잘 익은 토마토 같은 모습이겠지. 오늘은 정말 되는 일이 없나 보다.
비켜 줄래? 나 책 반납해야 해서.
목소리의 주인공이 책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아으, 미, 미안. 어리바리하게 문을 비켜서며 그 애가 도서실로 들어가는 것을 멍하니 쳐다봤다. 얼굴은 아직도 뜨거웠다. 후끈후끈. 토마토가 된 모습으로 교실로 돌아갈 순 없었다. 빨갛게 불에 익힌 숯불 멸치구이라며 또 놀림을 받을 것 같았다. 그냥, 창피했다. 그 여자애를 다시 보기가. 나를 놀리지도 않고 휴지(휴지가 맞겠지?)를 내밀어 줬는데도 나는 내가 쪽팔린 것만 알고 그 여자애를 버려두고 도망쳤다. 다시 또 불안감이 밀려왔다. 고개를 들고 도서실 내부를 흝었다. 진정이라도 해야겠다 싶어 도서실로 따라 들어갔다. 스읍, 후우. 콧구멍 안으로 신선한 바람과 오래된 책 내음이 맡아졌다.
그러고 보니, 너 성적이 꽤 좋더라.
심호흡을 하던 중에 누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목소리의 주인공이었다. 으, 응? 성적 말이야. 그 애가 다시 되짚어줬다. 어어, 맞아……. 너무 재수 없어 보였으려나? 다시 두근대면서 긴장되기 시작했다. 누군가와 대화다운 대화를 해 본 건 오랜만이었다. 얘가 말을 하는 걸 보는 것도 처음이었다. 너도 계획 같은 거 세우니? 어어? 아, 아니, 어, 으응……. 계획을 세운다고 안 세운다고? 어어, 아니, 나는 아니고 엄마가 세워……. 엄마가 세워주신다고? 너무 마마보이 같아 보였을까? 괜히 말했다 싶은 후회감이 살짝 들었다. 으응……. 그래, 그렇구나. 얘는 나를 비웃지도, 내가 한 말에 놀라지도, 어떤 표정도 짓지 않고 그저 호응을 했다. 대신 목까지 오는 단발머리를 귀 옆으로 꽂으며 책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우리, 같은 반인데. 그 애가 책을 구경하며 말했다. 아아, 그렇구나……. 응. 더 이상 다른 말이 오가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그게 불편하지도 않았다. 숨 쉬는 게 편안해졌다. 오랜만에 정말 오랜만에 누군가와 말을 텄다는 사실이 못 견디게 기뻤다. 평범한 사람들이 하는 평범한 대화였어. 싱긋 입꼬리가 말렸다. 단발머리가 책에 열중하고 있어 입가에 말린 입꼬리를 보지 못한 게 다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