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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결임 Oct 06. 2024

보통 사람들은 눈치가 빠르다는 것을 복으로 여기는 듯했다. 미디어에서 본 눈치 빠른 사람은 센스 있고 말도 잘 통하고 배려심도 있다고 했다. 하지만 내가 문제인 건지 사람 사이에 잘 끼어들지 못했다. 눈치가 빠른 사람은 모두에게 사랑받고 인기가 많다고 하던데. 나와 정반대의 일이었다. 자기 본심을 들킬까 봐 나를 꺼려하는 사람도 있었다. 내가 무슨 심리술사라도 되는 줄 아는 것 같았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척하지 말라고 했고 잘난 척하지 말라고도 했다. 뭐가 맞는 말이고 뭐가 틀린 말인지 구별을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나는 잘난 척을 하는 걸까?



아빠도 그랬다. 아빠가 대체로 날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렇게 티를 내니 모른 척할 수도 없었다. 보통 사람이더라도 알아챘을 수준이었다. 애써 외면해 봐야 상황이 달라지지도 않았을 거고.

아직 엄마와 아빠의 사이가 좋았을 때, 내가 내 손으로 계획을 망치기 전, 앞서 말한 날들보다 훨씬도 전에 그 사실을 알아차렸다. 어스름한 새벽, 환한 거실 불빛과 절그덕거리는 접시와 포크 부딪히는 소리에 잠깐 잠에서 깨어났었다. 가장 아끼는 분홍색 토끼 인형을 안고서. 그때 나는 침대에 누우면 엄마가 얼른 자라며 토닥여주고 노래를 불러주고 잠을 재워주던 나이였다. 한번 잠을 자면 좀처럼 잘 깨지 않는데도 그날따라 소음에 예민하게 반응했다. 토끼 인형을 끌어안은 채 침대에서 일어나 작은 몸을 이끌고 소음의 근원지를 찾아 나섰다. 방문 틈을 비집고 엄마와 아빠의 낯선 말소리가 새어 나왔다. 한 줄기 빛은 내 발등에 안착했다.



애 답지 않게 눈치가 참 빨라. 그래서 그런가, 정이 잘 안 가더라고.



아빠 목소리였다. 거기에 호응하는 엄마의 낮은 비음소리도 들렸다. 방 바깥을 나가선 안 될 것 같아 이부자리로 돌아갔다. 좋아하는 토끼 인형을 안고 눈을 꼭 감았다. 토끼가 내게 속삭이는 것 같았다. 부모가 자기 자식을 안 좋아할 수도 있어? 이전에는 생각해보지 않았던 문제였다. 그럴 수도 있어? 글쎄…… 어쩌면. 생각해 봐. 그럴 수 있을 거라 생각해? 잘 모르겠어. 토끼가 속삭였다. 네가 주워온 자식이라 그런 건 아니고? 말도 안 되는 소리! 눈을 뜨자 속삭임이 멈췄다. 하지만 말도 안 되는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고 또 이어졌다. 거실 불이 꺼진 한참 뒤에도 나는 여전히 말똥말똥한 눈을 깜빡이며 깨어있었다. 잠이 오지 않았다. 그렇게 충격인 것도 아니었는데. 어쩌면, 충격이었나?

꼬리에 꼬리를 물었던 생각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생각을 그만하려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건 당연하지 않구나. 당연하게 여겨선 안 되는구나. 날 사랑하도록 만들어야 하는구나. 딱히 슬프지는 않았는데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눈가와 왼 뺨이 간지러워 긁었다.

침대에 누워 밤을 꼬박 새우며 계획을 세웠다. 엄마 아빠가 날 사랑하도록 만들 계획. 내 계획에 따르면 엄마 아빠가 날 사랑하게 될 예상 일자는 13년 뒤였다. 단 13년 안에 엄마 아빠가 날 사랑하도록 만들어야 했다. 그래야만 부모 자식으로 살 수 있는 건 줄 알고.



그래서 엄마에게 아빠의 외도 사실을 알렸을 때는 내가 설계했던 13년 간의 장기 계획이 틀어질 것을 예감했다. 예상했고, 알고 있었고, 그랬는데도 알렸다. 아차 싶은 순간도 있었다. 아직 6년이나 남았는데. 하지만 나의 어리석음으로 생긴 상처에 더 이상 소금을 뿌리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 생각을 그만뒀다. 생각을 그만뒀는데도 의문은 풀리지 않았다. 엄마는 왜 진작에 눈치채지 못했을까? 아빠는 늘 그런 분이셨다. 매일이 바쁜 남자였다. 일이어서 바쁘고, 회식이라서 바쁘고, 동호회라서 바쁘고……. 아빠가 집에 있는 시간은 극히 적은 시간이었다. 오죽하면 숨겨둔 자식이라도 있는 건 아닐까 의심했을 정도였다. 나보다 예쁜, 소위 말해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자식이. 하지만 예상외로 자식은 나 하나밖에 없었다. 내가 유일한 엄마 아빠의 자식이었다.



엄마는 소송을 할 때는 분에 차서 날아다니더니 이혼 이후에는 시든 콩나물 같았다. 햇빛과 물을 주지 않아 시든 콩나물. 엄마는 집에 누가 있든 말든 없든 말든 거의 매일같이 거실에 앉아 병나발을 불었다. 잠을 잘 때도 있었고 티비를 볼 때도 있었고 병나발을 불 때도 있었다. 개중에는 캔도 있고 병도 있고 다양했다. 잠도 자지 않고 병나발을 불 때는 저주라도 하듯이 혼자서 중얼거리는 일이 잦았다. 나쁜 자식, 개 같은 자식, 개새끼, 여자 등 처먹는 새끼……. 온갖 종류의 욕이 다 나왔다 싶었을 때 엄마는 새로운 욕을 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나를 향해서.



마녀 새끼.



헛웃음이 나왔다. 엄마에게 나는 마녀 새끼였다. 의미는 모른다. 이유도 몰랐다. 나를 향한 혐오의 눈빛과 주변을 에워싸던 싸늘한 공기만 기억에 남았다. 아무렇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아무렇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그러다 차츰 우스워졌다. 엄마는 날 싫어했다. 아빠도 날 싫어했다. 사랑받겠다던 내 계획은 보기 좋게 엎어졌다. 어쩌다 이렇게 돼버렸을까. 눈치가 빠르다는 이유 하나로? 아빠의 외도 사실을 눈치채서? 숨기지 않아서? 내가 정이 가지 않는 아이라서? 의문이 줄지어 이어졌다. 그러다 생각하기를 멈췄다.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니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나를 원망하던 엄마의 우스갯소리도, 엄마 아빠의 지긋지긋한 말싸움도. 대화하려는 의지도 없어졌다. 내가 말을 하면 넌 날 싫어할 거잖아. 우리 엄마 아빠처럼. 내가 눈치 빠른 걸 알게 될 거야. 그럼 너도 날 원망하게 되겠지.

사람들은 나를 멀리했다. 한동안 말을 하지 않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어른들은 어린 나이에 충격으로 머리가 돌아버린 거라 생각하며 불쌍히 여겼다. 아이들은 나를 벙어리라 부르며 놀렸고, 나이를 좀 먹게 되자 철없던 시절에 했던 철없는 놀이라 여기며 내 놀림에 가담하지 않은 척했다. 더 이상 내게 말을 거는 아이는 없었다. 나도 알아. 말은 산 사람한테나 통하는 거잖아. 집에서 혼자 술을 퍼마시고 있을 엄마를 떠올렸다. 엄마는 그날 이후 죽은 거나 다름없었다. 밥을 먹지도 밖에 나가지도 않았다. 병나발만 불며 시들어갔다. 이미 죽은 것처럼.



'마녀 새끼'……. 엄마의 폭언 이후 보란 듯이 마녀가 되기로 했다. 의자에 꼼짝없이 앉아 최대한 모든 계획을 세웠다. 물을 마시는 것부터 해서 언제 어디서 어떻게 마실건지도. 나는 마녀로서 유능했다. 내 계획들은 학업에 있어 좋은 성과를 냈고 내 예언들은 신기하게도 늘 기정사실이 되었다. 눈치 빠른 것을 활용하니 쓰임새도 다양해졌고 시야도 넓어졌다. 엄마, 고마워요. 엄마의 저주 덕분에 저는 진짜 마녀가 될 수 있었어요. 심장 부근이 쓰라렸다. 한 가지 배운 점이 있다면, 더는 참견하지 않을 거라는 것. 결과가 어떻든 가만히 내버려 둘 것이다. 알고 있어도 모르는 척, 눈치채지 못한 척을 하며 철저히 방관자가 되어야지. 분명 쉽지는 않을 것이다. 뻔히 눈앞에 보이는 것을 부정하는 것도 어련히 어려울 테니. 비명소리가 들리면 귀를 막을 것이고, 누군가 내 앞에 선다면 눈을 감을 것이다. 눈치가 참 빠르구나……. 아빠가 했던 말이 거대한 손과 함께 꿈에서 자주 맴돌았다. 매일을 땀에 흠뻑 젖어 잠에서 깼지만, 그뿐이다. 눈치가 참 빠르구나. 눈치가 빠르니까 안다. 이건 그냥 꿈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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